투기 광풍의 시대…400년 전 화가의 눈에 비친 튤립 버블은? [김민의 그림이 있는 하루]

김민 기자

입력 2021-05-30 11:00:00 수정 2021-05-30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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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만장자 붐(The billionaire boom)’

약 2주 전인 14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주말판 특집 기사의 제목입니다. 코로나19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가운데, 각 선진국에서는 이 시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새로운 억만장자가 생겨났다고 하네요. 이로 인해 빈부격차나 사회 불안정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진단까지 더해졌습니다.

쉽사리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은 준비된 사람에겐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피부에 와닿기 때문인지 요즘 사람들 사이에선 언제나 빠짐없이 주식과 코인 이야기가 화두에 오릅니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는 공무원 한국사 강사인 전한길 선생님이 “일론 머스크가 하는 말을 왜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이 중요한 뉴스로 봐야 하느냐. 정상이 아니다”며 일갈하는 영상을 인상 깊게 보기도 했습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의견을 피력한다는 건 그만큼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겠죠.

그래서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과거의 이런 현상을 다룬 그림은 없을까? 호가스의 ‘선거’처럼 신랄하게 다뤄 준다면 재미있을 텐데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을 뒤적였습니다. 그리고 400년 전 플랜더스의 화가가 그린 이 그림을 찾았습니다. 저는 찾고 나서 ‘오, 역시!’하고 반가운 탄성을 질렀는데요. 그림을 그린 화가 브뤼겔이 제가 평소에도 좋아했던 아주 매력적인 작가여서입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들려드리겠습니다.

● 튤립 줍는 원숭이들의 희노애락
얀 브뤼겔(the Younger), 튤립 광풍에 대한 풍자, 1635/1645년, 프란스할스뮤지엄 소장


우선 그림의 첫 인상부터 볼까요. 원숭이들이 폴짝 폴짝 뛰어 다니고, 뭔가를 종이에 끄적이거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이네요. 그림 뒷편으로 보이는 탁 트인 풍경도 인상적입니다. 그림 왼쪽 아래를 볼까요? 오늘 그림의 가장 중요한 소재인 튤립이 보입니다.

이미 그림 내용을 눈치 챈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은 바로 1640년을 전후해 있었던 튤립 버블을 풍자한 그림입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튤립 알뿌리가 막대한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집 한 채 값까지 치솟았죠.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가격만 오르고 거래는 이뤄지지 않았으며, 법원에서 튤립의 재산적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오면서 순식간에 가격은 내려 앉습니다. 최고가에 비하면 수천분의 1 수준으로 떨어져 많은 사람들이 파산 했다고 전해집니다. ‘가만히 앉아 돈을 벌 수 있다’는 욕망과 허영심이 만들어 낸 독특한 자본주의적 현상이었던 것이죠.

브뤼겔은 이 현상에 동참한 사람들을 고약하게도 ‘원숭이’에 빗댑니다. 그림을 자세히 볼까요.




녹색 조끼를 입은 원숭이가 예쁘게 핀 튤립을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푸른 띠를 두른 원숭이는 악수로 튤립 거래를 진행하네요. 오른쪽 뒤 원숭이는 돈 주머니와 튤립을 들고 싱글벙글 웃고 있습니다. 튤립으로 ‘익절’을 꿈꾸고 있는 걸까요?

그 앞 노란 원숭이의 어깨에는 하얀 올빼미가 앉아 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서 올빼미는 ‘어두운 눈’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올빼미는 야행성이기 때문에 낮에는 사물을 잘 식별할 수 없다고 하네요. 오로지 돈을 향해 질주하는 투기꾼의 마음을 풍자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림 왼쪽을 볼까요. 긴 칼을 찬 원숭이가 튤립 뿌리들의 가격을 정리하고 있고 그 위로는 성대한 파티가 열리고 있습니다. 성공한 튤립 투자자들의 만찬인가 봅니다. SNL 방송을 기념해 일론 머스크가 열었다는 도지코인 파티가 떠오르네요.




오른쪽으로 가면 좀 더 다이나믹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버블이 터진 뒤의 모습입니다. 붉은 단상은 아마 법정인 듯합니다. 빚더미에 앉게 된 실패한 투기꾼 원숭이가 법정으로 끌려가고 있네요. 이 원숭이의 뒤로는 가치가 없어진 튤립을 들고 눈물을 훔치는 원숭이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가장 아래쪽 구석을 보면 투기꾼 원숭이가 튤립을 바닥에 두고 소변을 보고 있습니다. 투자 실패에 화가 많이 난 모습입니다. 저 멀리 뒤편에는 칼싸움을 벌이는 원숭이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전체 그림의 더 멀리로는 장례식이 치러지는 장면도 표현되어 있답니다.

마냥 우습게만 볼 순 없는 신랄한 풍자입니다. 400년 전 유럽의 사람들도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성공한 자는 화려한 파티를 즐기고, 실패한 자는 극도의 분노에 휩싸이거나 극단적 고통을 겪게 됐다니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재밌는 건 이 상황을 지켜 본 화가는 사람들을 ‘원숭이’에 빗대었다는 부분이네요. 세상엔 돈 말고도 중요한 게 많다는 불만의 표현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네덜란드 황금기’를 이끈 화가, 브뤼겔
이쯤 되면 ‘이런 그림을 그린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궁금해집니다.

이 그림을 그린 얀 브뤼겔은 ‘손자 브뤼겔’인데요, 아버지도 이름이 같은 얀 브뤼겔입니다. 그리고 얀 브뤼겔의 할아버지 피터 브뤼겔은 플랜더스를 대표하는 작품을 남겼고, 그 영향을 받은 브뤼겔 형제들도 수많은 흥미로운 작품을 그렸습니다. 말하자면 브뤼겔 가족이 남긴 회화가 16,17세기 플랜더스 예술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피터 브뤼겔의 그림을 볼까요.

피터 브뤼겔(the Elder), 농가의 결혼식, 1566-69년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것 같은 활기와 인간적인 따스함이 느껴져 제가 정말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우선 그림 속에 정말 많은 사람이 있는 것 보이시죠? 노련한 브뤼겔은 이 시끌벅적한 순간을 답답하지 않게 재밌는 구도로 활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바로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이어지는 길다란 테이블의 대각선, 그리고 수프를 실어 나르는 두 사람의 움직임이 이 대각선과 연결되면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해보세요. 두 사람이 실어 나르는 받침대에서 수프를 들어 옮기는 붉은 모자를 쓴 남자가 역동적인 움직임을 그림에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가장 왼쪽 남자가 음료를 붓는 모습, 악기를 연주하는 남자의 표정, 앉아 있다 고개를 살짝 든 남자의 모습까지. 그림은 정지 화면 이지만 움직이는 영상을 잠시 멈춘 것처럼 활기가 느껴집니다.

근데 이 그림은 ‘결혼’이잖아요. 아마 결혼식이 끝나고 피로연 현장이겠죠? 그림 속에서 신부를 한 번 찾아보시겠어요?





신부를 표현한 화가의 재치도 너무 재밌습니다. 농가에 잠시 걸어 놓은 듯한 초록색 천과 거꾸로 걸려 있는 모자. 그 아래에 앉은 사람이 신부이지요. ‘이 사람이 신부다’라고 과장해서 화려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가운데 눈에 띄게 하는 센스가 돋보입니다. 아버지 브뤼겔은 실제로 만나도 정말 재밌는 사람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브뤼겔의 후손들은 아버지의 그림을 카피하고 복원하면서 더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튤립 광풍처럼 재밌는 자신의 그림도 그렸구요. 아들 브뤼겔 작품 중에 이런 그림도 있습니다.

피터 브뤼겔(아들), 시골의 싸움, 1637,8년


정겨운 시골 풍경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 육탄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바닥에 널브러진 카드와 허공에 떠오른 술병이 보이네요. 맑은 공기 마시며 함께 카드 게임을 하다가 어느 한 명이 몹시 화가 난 모양입니다. 역시나 순간 포착이 돋보이는 역동적인 그림이죠?

제가 브뤼겔을 좋아하는 건 이런 이유입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미술사에서는 늘 사조나 과거의 왕, 종교를 중심으로 한 그림만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사실 그 미술사는 전 세계 수많은 그림들의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며, 과거에도 이렇게 사람 냄새 나는 재밌는 예술이 있었다는 걸 간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신과 왕은 과거의 것일 뿐이고, 지금 제게 중요한 것은 그 때를 살았던 개개인들의 살 냄새나는 희노애락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00마디의 말보다 이미지 한 장이 더 많은 것을 이야기 해 준다는 걸 이런 그림을 통해서 느끼는데요. 아, 이 때 사람들은 이런 옷을 좋아했구나. 또 인간 관계에서 이런 일들도 겪었구나, 돈 때문에 울고 웃었구나. 이런 감흥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미술사의 매력이 아닐까요?

이 브뤼겔의 영향을 받은 네덜란드 회화에서는 술 마시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부터 멋진 자연의 풍경까지 감상할 수 있습니다. 더 놀라운 건 이 그림들이 왕족이나 교회의 주문이 아니라 형성된 시장에서 중산층 컬렉터를 위해 거래가 됐다는 점입니다. 실질적인 자본주의 미술 시장이 또 가장 빨리 형성된 곳이 네덜란드 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더 피부에 와닿고 재밌는 그림들이 탄생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로의 생생한 시간 여행에 흥미를 느끼셨다면, 이번 주말 ‘네덜란드 황금기 회화’(Dutch Golden Age Painting)를 검색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참고한 자료
프란스 할스 미술관(https://www.franshalsmuseum.nl/en/art/satire-of-tulipomania/#:~:text=Satire%20of%20Tulipomania%20Satire%20of%20Tulipomania,-Jan%20Brueghel%20(II&text=In%20the%2017th%20century%20tulips%20became%20an%20extraordinary%20craze%20in%20the%20Netherlands.&text=This%20painting%20makes%20fun%20of,and%20monkeys%20do%20the%20administration.)

구글 아트 앤 컬처(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satire-on-tulip-mania/mgGlRItx0kBwuA?hl=en)

위키피디아(https://en.wikipedia.org/wiki/Pieter_Bruegel_the_Elder)

네덜란드 튤립 축제 웹사이트(https://tulipfestivalamsterdam.com/painting-allegory-on-tulipmania-by-jan-brueghel-the-younger-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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