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여제’ 박인비와 멀리 떠난 할아버지 [김종석의 TNT타임]

김종석 기자

입력 2021-05-25 13:12 수정 2021-05-25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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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금메달을 딴 뒤 귀국해 인천국제공항에서 할아버지와 포옹하고 있는 박인비. 박인비는 자신을 누구보다 아꼈던 할아버지가 24일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동아일보 DB


‘골프여제’ 박인비(33)는 지난주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복귀를 위해 출국하기에 앞서 경기 용인시 한 노인요양병원을 들렀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면회가 힘든 상황이었지만 입원 중인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관계당국의 사전 허가를 받아 먼발치에서나마 뵐 수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24일 박인비는 미국에서 할아버지 박병준 옹(87)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접했다. 당장이라도 귀국길에 오르고 싶었지만 코로나19 여파로 이동이 쉽지 않은 상황에 가족의 만류도 있어 멀리서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했던 할아버지의 명복을 빌었다.

●할아버지 소원으로 골프 시작한 소녀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남편(당시 약혼자), 여동생과 가족 골프 라운드를 하고 있는 박인비. 동아일보 DB


박인비 골프 인생에 할아버지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존재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박인비가 처음 골프를 시작한 것도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 젊은 시절부터 사업을 하며 골프를 친 할아버지는 아들, 손주 3대가 골프 라운드를 함께 하는 것이 소원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박인비 아버지 박건규 씨는 이런 사연을 전하며 “어느 날 인비도 이제 골프할 때가 된 것 아니냐는 아버지 말씀에 골프장으로 데리고 갔다”고 말했다.

박인비가 태어났을 때 어진 여왕이 되라는 의미로 ‘인비(仁妃)’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할아버지였다. 박인비가 초등학교 시절 골프에 재주를 보여 중학생 때 미국 유학을 놓고 고심하자 할아버지는 적극 후원에 나섰다 그 덕분에 박인비는 집안의 맏며느리였던 어머니 김성자 씨, 동생 인아 씨와 미국 플로리다로 떠날 수 있었다.

한때 싱글 골퍼였던 할아버지는 가끔 손녀인 박인비와 골프를 치는 걸 큰 즐거움으로 여겼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딴 금메달을 할아버지에게 걸어드린 박인비. 동아일보 DB


●올림픽 금메달 목에 걸어주며 눈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박인비가 금메달을 딴 뒤 귀국했을 때 할아버지는 다른 가족과 함께 오전 3시부터 인천국제공항에서 손녀를 손꼽아 기다렸다. 당시 현장에 있던 기자는 할아버지가 걸어준 꽃다발에 눈물을 흘리던 박인비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할아버지가 “힘들었지”라며 큰일을 해낸 손녀의 등을 두드려줬을 때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해 ‘침묵의 암살자’라고까지 불렸던 그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던 표정 변화였다. 박인비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금메달을 할아버지 목에 걸어주면서 꼭 안아드렸다. 할아버지는 “인비가 이제 국민의 딸이 된 것 같다”며 감격스러워했다.

박인비는 리우올림픽 출전 자체를 망설였다. 손가락 부상이 심해져 극심한 슬럼프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후배들에게 태극마크를 양보해야 한다는 여론까지 일었다. 본인 역시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때도 할아버지의 말씀이 큰 힘이 됐다. “국가를 대표한다는 건 쉬운 일이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면 좋겠다.” 박인비가 마음을 다잡고 올림픽에 대비한 운동을 재개했다는 얘기에 할아버지는 “이젠 됐다”며 기뻐했다.

●80대에도 18홀 따라다니며 열성 응원
80대에도 할아버지는 박인비가 국내 대회에 출전하면 대회 기간 사나흘 동안 내내 18홀을 같이 따라 걸으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2014년 위암 투병 중에도 한일 국가대항전에 출전한 박인비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응원할 정도로 손녀 사랑이 남다르다.

박인비가 2017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LPGA투어 HSBC챔피언십 우승 후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등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 DB


2017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LPGA투어 HSBC 챔피언십 때는 아들 부부, 박인비 동생 인아 씨와 현장을 찾기도 했다. 박인비는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해산물, 고기 등을 대접해야 한다며 싱가포르 맛집을 모시고 다녔다. 이 대회에서 박인비는 72홀 노보기 플레이라는 완벽한 경기력을 펼친 끝에 우승 트로피를 안은 뒤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드린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대회가 끝나고 귀국한 뒤 며칠 후 할아버지는 갑작스러운 뇌경색으로 쓰러져 오랜 세월 병원에 누워있었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인비가 우승하는 것도 직접 봤으니 여한이 없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하이난 성 하이커우에서 열린 골프대회에서 손녀 응원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 박병준 씨. 동아일보 DB


●어려서부터 가족의 소중함 강조
경기 안산에서 용기 포장재 제조업체 유래코를 창업해 건실한 중견기업으로 키운 할아버지는 가족의 소중함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명절 때면 친척 수십 명이 모여 차례도 지내고 음식을 나눠먹는 걸 큰 즐거움으로 여겼다. 회사도 인화를 강조했다. 박인비가 우승이라도 하면 회사 직원들은 떡을 돌리며 축하 잔치를 벌였다.

어려서부터 이런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접한 박인비도 가족 사랑이 남다르다. 박인비는 LPGA투어 일정이 비면 수시로 귀국해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그래야 재충전이 잘되는 것 같다고 한다. 귀국해 집에 있을 때면 직접 고기도 굽고, 국도 끓여 가족에게 식사 대접하는 걸 큰 즐거움으로 여긴다. 미국에서도 수시로 할아버지, 할머니와 화상통화로 안부를 묻곤 했다. 박인비가 한때 골프를 관둘 위기에서 다시 부활한 데는 현재 남편인 남기협 씨의 도움이 컸다는 건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코치, 캐디, 매니저, 스폰서 등도 식구처럼 여기며 좀처럼 바꾸지 않고 있다. 오랜 세월 한 배를 타다보니 끈끈한 정이 쌓여 경기력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킨다는 평가다.

할아버지는 이제 먼 곳에서 손녀를 지켜보게 됐다. 박인비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질지도 모르겠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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