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가루가 말했다… 지구 식생이 4000년 전부터 급변했다고

고재원 동아사이언스 기자

입력 2021-05-24 03:00 수정 2021-05-24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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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 꽃가루 분석해 봤더니

다양한 꽃가루의 모습을 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한 뒤 색을 입혔다. 싱가포르 난양공대 제공

5월은 1년 중 꽃가루가 가장 많이 날리는 시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는 요즘엔 기침을 유발하는 꽃가루는 특히 유쾌하지 못한 불청객이다. 하지만 과학계에서 꽃가루는 수만 년 동안의 기록을 담고 있는 ‘타임캡슐’로 높이 평가한다. 미국과 호주, 노르웨이, 독일 등의 연구자로 구성된 국제연구팀이 꽃가루를 분석해 지난 1만8000년 동안 지구 식생의 변화상을 알아냈다.

온드레이 모틀 노르웨이 베르겐대 생물과학부 교수와 에릭 그림 미국 미네소타대 지구과학부 교수팀은 4000년 전 지구에 전례 없는 급격한 식생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21일 발표했다.

연구팀에 현재의 기후위기를 촉발한 18세기 산업혁명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광범위한 식생 변화가 일어났다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한 것은 작은 꽃가루였다. 꽃가루는 식물의 정자를 품고 있다가 암술에 닿으면 꽃가루관을 내밀어 정자를 넘긴다. 꽃가루는 정자를 품고 있어 외부 세포벽은 매우 단단한 편이다. 세포벽은 스포로폴레닌이라는 단단한 단백질로 싸여 있어 황산에도 녹지 않고 고온고압 상태에서도 수만 년 보존된다.

꽃가루는 크기가 지름 100μm(마이크로미터·100만 분의 1m) 이하로 작지만 식물의 종류마다 모양과 크기가 다르다. 꽃가루는 연대별로 호수나 늪지의 퇴적물에서 발견되는데 이를 분석해 그 당시의 상황을 알아낼 수 있다. 과학자들이 꽃가루를 식물의 타임캡슐과 같다고 평가하는 이유다. 나무 나이테나 산호의 뼈대도 과거 상황을 추리하는 단서로 쓰인다. 하지만 꽃가루는 이 단서들보다 더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연구팀은 고생물학 연구자료 공개 플랫폼인 ‘네오토마 고생물학 데이터베이스’에 공유된 꽃가루 1181개를 분석했다. 남극 대륙을 제외한 전 세계 모든 대륙에서 수집한 것으로 가장 오래된 꽃가루는 1만8000년 전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팀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 북미와 남미,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서 꽃가루의 종류가 급격히 달라지는 현상이 동일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전 지구의 식생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때 영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연구팀은 이런 현상이 빙하기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고 보고 있다. 연구팀에 따르면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는 시점인 약 1만1000년 전 식생 변화가 정점을 찍은 후 약 4000년 전까진 식생에 큰 변화가 없었다. 연구팀은 “이미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한 인간의 토지 사용과 농업, 도시화 등 영향이 식생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연구팀은 지구 식생 변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연구팀은 “인류의 직접적 영향과 인류로 인해 발생한 기후변화가 지구 식생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식생 변화 속도는 다시 한 번 신기록을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앞서 꽃가루를 이용해 인류 활동이 온난화의 한 원인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미국 와이오밍대 연구팀은 2018년 북미와 유럽의 꽃가루 화석 642개를 분석해 인간 활동이 없었다면 지구의 기온은 떨어졌을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고재원 동아사이언스 기자 jawon121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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