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달려, 코로나 따윈 잊고…2030, 마라톤에 ‘입덕’

강동웅 기자

입력 2021-05-22 03:00 수정 2021-05-2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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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몸-마음 챙기는 언택트 달리기로 힐링하는 2030
SNS로 모여 달리는 ‘러닝크루’, 비대면 시대… 말없이 각자 뛰어
‘젊음의 분출구’로 급속히 번져… 모임서 사진 찍어 회원에 제공
‘달리는 인생샷’ 보며 스스로 만족… 뛰면서 마음 통해 커플 되기도


2년 차 직장인이었던 2018년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뛰기 시작한 장효진 씨는 낯선 사람들의 응원에 매료돼 마라톤에 빠져들었다. JKLEE PICTURES 제공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응원을 받을 일이 잘 없잖아요. 근데 뛸 때는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저를 응원해줘요. 그래서 달리게 됐어요.”

장효진 씨(27·여)에게 마라톤을 시작한 계기를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2018년 5월 처음 러닝을 시작할 당시 장 씨는 2년 차 직장인이었다. 잦은 야근에 건강이 상했고, 사람에게 받는 상처도 늘어가며 몸과 마음이 지쳐 가고 있었다.

장 씨는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업무를 보다가 오후 8시가 되면 5, 6km를 뛰고 돌아와 남은 일을 했다. 그해 11월 한 마라톤 대회에 도전했다. 달리다 급수대에서 물을 마시는데 주변에서 “힘내요”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장 씨와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람들이었다. 일순간 장 씨의 마음에 따뜻함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마라톤에 빠져들게 됐다.

○2030, 마라톤에 ‘입덕’하다


장 씨 같은 2030세대의 러닝 인구가 늘고 있다. 2021서울마라톤조직위원회에 따르면 2016년 8382명(31.1%)이던 20, 30대 참가자가 이달 열린 올해에는 1만966명(64.4%)까지 늘어났다. 특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젊은층의 달리기에 대한 열망이 널리 퍼지고 있다.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국가대표 출신 장호준 코치(29)는 “2018, 2019년을 넘어가면서 2030세대 러너가 점차 많아지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러닝크루 문화 도입이 젊은 세대 달리기 열풍에 큰 몫을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러닝크루는 SNS를 기반으로 하는 운동 모임이다. 2010년대 미국 유럽 등에서 처음 생겨난 개념. 학교나 지역, 직장 등을 중심으로 구성돼 기존 동호회에 비해 진입 장벽이 낮다. 장씨는 “러닝크루에서는 이어폰을 끼고 달리면 방해하는 사람이 없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거나 뒤풀이 없이 뛰기만 하다 돌아가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고 전했다.

러닝크루 중에는 ‘띠 크루’도 있다. 비교적 젊은층이 모인 러닝크루 안에서도 나이에 따른 서열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같은 나이의 사람들끼리 러닝크루를 만든 것이다. 1991년생 양띠만 가입할 수 있는 ‘뛰꼬양’이 대표적이다. 2017년 6월 2일 오후 8시 서울 뚝섬한강공원에서 처음 10여 명이 만든 뛰꼬양은 지금은 80명이 넘는다.

크루 안에서 다양한 직업군의 청춘들이 모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너지도 난다. 직장인 김민선 씨(29·여)는 소속 러닝크루 ‘크루고스트’의 크루장이 대표로 있는 정보기술(IT) 회사로 이직했다. 러닝과 봉사활동을 겸하는 러닝고스트에 가입한 이후 사회 공헌에 관심이 많은 대표와 뜻이 맞아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것이다. 말 그대로 ‘덕업일치’(취미와 일의 조화)를 이룬 셈이다.

○달리기를 통해 심신 힐링

김 씨에게 SNS는 중요한 힐링법 중 하나다. 김 씨는 인스타그램 개인 계정에 자신만이 사용하는 해시태그를 만들었다. 자신이 가장 빛나고 멋지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으면 그 게시물에 해당 해시태그를 달았다. 일상 중 슬럼프가 오거나 힘이 들 때면 이 해시태그를 검색한다. 김 씨는 “내 해시태그로 들어가면 과거 청춘이었던 나에게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김 씨의 해시태그 속 주된 게시물은 마라톤을 하고 있는 자신의 사진이다. 대부분의 러닝크루에는 1∼3명의 사진작가가 있다. 사진을 직업으로 삼거나 적어도 취미가 있는 사람들이 크루원들과 함께 달리며 사진을 찍어준다. 꼭 대회가 아니더라도 정규 모임이 있으면 사진기를 들고 참석해 크루원들의 모습을 담고, 보정까지 해 제공한다. 그 대신 크루원들은 SNS에 사진과 함께 해당 사진작가를 태그해 홍보를 돕는다.

SNS에 올린 사진이 인기를 끌면 행복감도 배가된다. 김 씨가 6년간 인스타그램에 올린 게시물 수는 3000개가 넘는다. 일주일에 네 차례에 걸쳐 40km 정도를 달리는데, 매순간 즐거웠던 달리기는 바로 업로드한다. 팔로어는 1400명을 넘어섰고 러닝 사진마다 ‘좋아요’가 200개가량씩 올라간다. 인기 게시물을 통해 광고 섭외가 들어오기도 했다.

이제길 뛰꼬양 크루장(30)은 크루원들의 사진을 찍어주며 행복을 느낀다. 이 씨는 현재 대학원 핵융합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졸업논문을 준비 중이다. 사진 찍기가 취미인 이 씨는 “달리기의 주인공은 인플루언서가 아닌 뛰는 사람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크루원들이 자신이 주인공이란 걸 알릴 수 있도록 전문적인 사진을 찍어주면서 기쁨이 커졌다”고 밝혔다.

‘뛰꼬양 러닝크루’ 회원인 김정은 씨는 러닝크루에서 만난 남자친구 이훈 씨와 서울 용산구 노들섬 일대를 함께 달리는 등 달리기라는 공통 관심사를 공유하며 데이트를 즐긴다. JKLEE PICTURES 제공
러닝크루에서 소중한 인연을 찾기도 한다. 2019년 9월 뛰꼬양에 가입한 직장인 김정은 씨(30·여)는 다른 회원 이훈 씨(30)를 만난 뒤 지난해 6월 뉴발란스 러닝크루인 ‘NBx’에서 받은 미션을 함께하다 마음이 통했다. 2km를 전속력으로 뛰어야 하는 미션 중 김 씨가 500m를 남기고 포기하려 하자 미션을 먼저 끝낸 이 씨가 다가와 “끝까지 해야 한다”며 응원해주면서 마음의 문을 열게 된 것.

달리기라는 공통 관심사로 묶인 커플이다 보니 함께하는 모든 것이 즐겁다. 김 씨는 “가끔 다투더라도 함께 달리기를 하고 나면 그 즐거움에 취해 자연스럽게 말도 걸고 사과도 하면서 풀린다”고 말했다. 일주일 전에는 제주도로 트레일러닝을 다녀오기도 했다. 3박 4일간 송악산 둘레길을 따라 관광과 러닝을 함께하는 이색 데이트였다.

○코로나로 더 낮아진 진입장벽

러닝은 본래 진입장벽이 낮은 운동이다. 러닝화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진입장벽이 더 낮아졌다. 서울마라톤 등을 중심으로 널리 퍼진 ‘버추얼 마라톤’ ‘할부 마라톤’ 방식 덕분이다.

버추얼 마라톤은 각 개인이 가진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앱)을 활용해 각자 원하는 장소에서 달리기를 한 후 기록을 인증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2021 서울마라톤 역시 버추얼 마라톤으로 진행했다. 집 근처 어디서든 달릴 수 있어 참가자의 부담을 크게 낮췄다.

해외에서는 버추얼 마라톤 방식을 활용해 참가자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기도 한다. 유구한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미국 보스턴마라톤은 지난해 124년 역사상 첫 비대면 마라톤을 개시했다. 참가자들은 9월 7일부터 일주일간 특정 앱에 접속해 6시간 동안 풀코스를 달린 후 이를 인증해 완주 메달을 받았다. 앱에는 참가자가 달린 거리에 따라 보스턴마라톤의 전통적인 마라톤 코스를 달린 것으로 표시됐다.

할부 마라톤은 버추얼 마라톤을 통해 파생된 달리기 방식이다. 풀코스, 하프코스 등을 달리기 어려운 초보 러너들이 한꺼번에 달리는 게 아니라 대회 기간 동안 나눠 코스를 완주하게 된다. 하프마라톤인 21km를 9일간 3km씩 나눠 달리고, 매일 달린 기록을 대회 주최 측에 보내면 완주를 인정해준다.

서울 방일초 6학년 김태환 군이 9일 서울마라톤 하프코스를 완주한 뒤 그의 어머니 고윤주 씨와 인증 사진을 찍었다. JKLEE PICTURES 제공
서울 서초구 방일초에 다니는 6학년 김태환 군(12)은 이 혜택을 그대로 만끽했다. 김 군은 책에서만 접했던 마라톤을 직접 시도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서울마라톤에 참가 신청을 한 뒤 하프마라톤을 1일부터 9일 동안 나눠 완주했다. 김 군은 이제 마라톤에 관심 없는 또래 친구들에게도 “같이 뛰지 않을래”라고 묻고 싶어졌다고 한다.

김 군의 도전은 어머니 고윤주 씨(48)에게도 귀중한 경험이었다. 다같이 모여서 뛰지 못하는 참가자들을 위해 서울마라톤은 플로깅(쓰레기 주우면서 뛰기), 인생런컷(완주자 기념사진 찍어주기) 등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했다. 고 씨는 “아이와 함께 소중한 추억을 쌓을 수 있어 감사했다”며 “지난해 무릎 인대가 끊어져 3개월간 목발을 짚고 다녔던 터라 이번 서울마라톤의 ‘다시 뛰지 않을래?’라는 슬로건이 내게 용기를 줬다”고 말했다.


6년새 2030 여성 참가자 2배로 늘어난 서울마라톤, 달리기 문화 선도


하반기에 집단면역 활성화되면 종전 오프라인 개최 방식도 고려


2021 서울마라톤에 참가한 김예진 씨가 9일 서울 영등포구 양화한강공원에서 지인들과 함께 기념 메달 4개를 한데 모아 풀코스 완주를 인증하고 있다. 사진 출처 김예진 씨 인스타그램
2030 달리기 열풍은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2021 서울마라톤을 강타했다. 서울시와 동아일보, 스포츠동아가 주최한 이번 이벤트는 1∼9일 열렸다. 지난달 12일 오전 10시 참가 접수가 시작된 지 90분 만에 전체 1만5000명 신청이 마감될 만큼 인기가 높았다. 신청자가 한꺼번에 몰려 대회 홈페이지가 일시적으로 다운되기도 했다. 초기 접수에 1만3600명, 지난달 19일 추가 접수에 3426명을 포함해 총 1만7026명이 참여했다.

서울마라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으로 함께 뛰지 못해 아쉬움이 많은 참가자들을 위해 다양한 이벤트를 제공했다. 포스터 소문내기, 기념품 알리기, 인생런컷, 플로깅, 우리동네 런트립 등 10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마라톤 활용법을 제시했다. 함께 모여 뛰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각 참가자들이 저마다의 방식과 코스로 달려 완주를 인증했다.

서울마라톤은 시민들의 달리기 문화도 바꾸어 놓았다. 참가자들은 저마다 기념품 언박싱(개봉) 영상과 사진을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며 높은 관심을 보였다. 또 자신만의 개성 있는 러닝코스를 직접 짜서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다른 마라토너들과 공유하기도 했다. 비대면 방식인 버추얼 마라톤으로 진행된 만큼 기록이나 거리에 제한 없이 자유롭게 참가했다.

참가자 중 20, 30대가 64.4%(1만966명)를 차지할 만큼 젊은 참가자들의 참여 비율이 높았다. 2030세대의 참가 비율이 지난해(47.3%·1만8052명)보다 20%포인트가량 늘었다. 특히 여성 참가 비율은 37.0%(6302명)으로 6년 전인 2016년(18.0%·4854명) 대비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앞으로도 마라톤 묘미를 만끽할 무대는 계속 마련된다. 서울마라톤은 상반기 버추얼 마라톤에 이어 하반기 엘리트 대회를 준비 중이다. 집단면역이 활성화될 경우 일반인 참가도 고려하고 있다. 대회 일정과 형식은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주최 측인 서울시, 대한육상연맹 등과 협의한 뒤에 확정될 예정이다. 공주마라톤, 경주국제마라톤도 버추얼 마라톤으로 열릴지 종전 방식의 오프라인 대회로 열릴지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매년 10월 둘째 주에 열리는 서울달리기대회도 서울시와 논의를 거쳐 개최 방식이 결정될 계획이다.

강동웅 기자 lep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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