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으로 창업한 ‘신인류 재벌’들이 몰려온다[최영해의 폴리코노미]

최영해기자

입력 2021-05-16 09:00 수정 2021-05-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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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아낌없이 재산 나누는 청년 창업 재벌들
과거 재벌 스토리와 다른 길 걷는 ‘신인류 재벌’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부럽지 않은 새 역사 쓰나


“크래프톤 창업자이자 최대 주주 장병규입니다. 오랜 만에 이사회 의장도 아니고 HR본부장도 아닌 자연인 장병규로 메일을 보냅니다. 제가 크래프톤 전체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최대 1천억 원 상당의 개인 주식을 무상으로 증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사주조합 제도와 별개입니다.”

어린이날 다음 날인 5월 6일 게임 ‘배틀그라운드’로 유명한 크래프톤의 임직원들은 장병규(48) 이사회 의장으로부터 이런 글로 시작하는 e메일을 받았다. 하반기 기업공개(IPO)를 통해 증권거래소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크래프톤의 직원들은 우리사주조합을 구성해 조만간 자사 주식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터였다. 여기다 덤으로 장병규 의장이 자신의 주식 1000억 원어치를 내놓고 직원들에게 나눠준다는 ‘깜짝 선물’에 직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개발자 초임 연봉을 4000만원에서 6000만원으로 50%나 올리겠다고 선언한데다 최근엔 지난해 성과급까지 두둑이 받은 상황이라 장병규의 사재(私財) 출연 소식으로 직원들은 ‘돈복’이 터진 셈이다.


●3000만원어치 주식보너스 받게 된 크래프톤 직원들
문재인 정부에서 4차산업혁명위원장을 맡기도 했던 장병규 크래프톤 이사회 의장이 2019년 10월 서울 조선호텔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하는 모습.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그가 1000억원 주식을 무상 증여키로 결정한 것은 크래프톤에서 일하는 해외법인 직원들은 우리사주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장병규는 e메일에서 “한국의 법과 제도의 한계로 해외법인 소속은 수혜 대상이 아니고, 열심히 검토했지만 대안도 마땅치 않아 사적인 결심을 했다”라며 “해외법인과 한국법인을 포함한 전체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사재를 무상증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저의 글로벌 고객, 시장, 구성원들 등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 받아주시면 감사하겠다”고 적었다. 크래프톤의 해외 근무 직원과 국내 근무 직원은 절반씩으로 구성돼 있다.

장병규의 통 큰 결단에 따라 2019년 12월말 이전에 입사한 직원은 1인당 최소 50주 이상, 올해 5월말 이전 입사자들은 최소 40주 이상, 그리고 아직 입사하지 않은 9월말 이전 입사예정자들은 최소 10주 이상을 받게 됐다. 그가 제시한 원칙은 △크래프톤과 보다 오랫동안 함께 온 구성원들이 좀 더 받았으면 좋겠고 △앞으로도 계속할 구성원이 받았으면 좋겠으며 △조직에서의 역할 책임에 따라 벌어지는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3가지다. 크래프톤 직원은 현재 2100명으로 올해 700명 이상을 더 채용할 방침이다. 장외시장에선 주당 300만원에 육박하는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최근 주식액면을 분할해 1주가 5주로 쪼개졌다. 근속연수나 직급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1인당 평균 3000만원 남짓한 주식 보너스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장병규는 자신의 아내인 정승혜 이름으로 된 주식을 직원들에게 증여할 것이며 창업 초 투자 유치가 힘들어 아내 이름으로 된 현금까지 털어 투자한 것을 직원들과 나누게 된 것에 감회가 새롭다고 e메일에 적었다. 창업 초기 부인 돈까지 끌어오면서 쩔쩔 매던 때가 새록새록 떠올랐을 것이다. 그는 크래프톤 주식을 16.43% 보유한 최대 주주로 주식 자산가치가 최소 4조~5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모교 카이스트에 동문 최고액 100억원 기부한 이유

그는 대구과학고를 조기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부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은 뒤 같은 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바로 창업의 길로 뛰어들었다. 1세대 포털인 네오위즈를 공동 창업하고 검색업체 첫눈과 게임 ‘배틀그라운드’ 개발회사인 블루홀을 창업했다. 벤처캐피털 회사인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 창업자이기도 하다.

장병규는 지난해 1월엔 개교 50주년을 앞둔 모교 카이스트에 100억원을 기부해 화제가 됐다. 카이스트 동문으로선 가장 많은 돈을 내놓은 것이다. 회삿돈이 아닌 개인 재산으로 기부를 한 것도 인상적이며 100억원이란 큰 돈을 내놓으면서 한 얘기 또한 흥미롭다. 장병규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생소한 단어를 꺼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우연한 발견, 우연한 성공 가능성’ 쯤으로 되겠다.


●‘우연한 성공가능성’을 얘기하다

4번의 창업을 모두 성공시킨 장병규는 벤처업계에서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린다. 2019년 5월 서울 서초구 펍지(PUBG)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하면서 “실패가 훨씬 많지만 그 안에서 성장을 얻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크래프톤



“스타트업 벤처를 창업하면서 제가 잘 나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성장을 하면서 ‘이것은 나만의 성공이 아니구나’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창업을 시작한 1996년만 해도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지 않으면 욕먹는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은사님인 김길창 교수님께서 창업을 허락해 주시지 않았다면 과연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한 때 저도 ‘슈퍼 프로그래머’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재학 시절에 우리 학생들이 만든 수강신청 시스템을 전자계산소에서 학교 행정시스템으로 사용하는 것을 허락해줬습니다. 당시 전자계산소장인 김병천 교수님이 의사결정을 해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시스템을 만들었던 동아리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기부로 탄생한 동아리였습니다. 그런 우연 가능성을 높이는 곳이 KAIST이고, 그 우연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데 일조한 것이 기부라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깨닫게 됐습니다.”

‘우연’과 ‘성공’은 사실 그리 잘 어울리진 않는 말이다. 여러 가지 우연한 사건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지금의 성공을 가능하게 했다는 인식은 겸손하면서도 기업가정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거기엔 고단한 창업의 소회도 녹아 있을 것이다. 카이스트 동아리가 창업의 산실이었고, 여기에 외국계 기업의 기부가 있었으며, 그 동아리에서 활동한 장병규는 과연 모두 우연의 일치였을까.


●KAIST 컴퓨터 동아리가 창업의 산실
그가 활동한 동아리는 KAIST 내 ‘스팍스(SPARCS)’라는 컴퓨터 동아리를 말한다. 전산학부 3학년 때 교내 온라인 수강신청 시스템을 개발한 것이 창업의 계기가 됐다.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학기 초 수강신청을 위해 학생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곤 했다. 장병규는 “학생을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학교를 위해 함께 일하는 동료로 생각하고 믿어준 카이스트 임직원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회고했다.


카이스트 계절학기에 열리는 1학점짜리 ‘몰입캠프’엔 카이스트 재학생 뿐 아니라 타 대학생과 외국 소재 대학생까지 몰릴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고 인기도 높다. 사진 카이스트 홈페이지


장병규는 학교와의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열정을 갖고 몰입했고, 당시에 쌓은 실력과 자그마한 명성이 창업의 길로 이끌게 됐다고 한다. KAIST 전산학부 동기생이자 친구인 류석영 KAIST 전산학부 교수와 함께 후배들에게 이런 노하우를 전수하기 위해 이른바 ‘몰입캠프’를 2016년 겨울방학 때부터 운영하고 있다. 계절학기 1학점 과목으로 처음엔 카이스트 학생을 대상으로 하다가 소문이 나자 국내 타 대학생, 최근엔 외국 대학 재학생까지도 지원할 수 있도록 문호를 열어 놨다. 강의는 별로 없고, 대부분 시간을 학생이 정한 주제를 갖고 프로그래밍을 통해 완성하는 ‘프로젝트 중심’ 과정이다.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학생들을 뽑아 융합형 인재를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장병규가 재학 시절 몰입했던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물려주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KAIST 후배들을 위해 ‘몰입캠프’ 강사에 빠짐없이 나서고 있으며, 컴퓨터 동아리인 스팍스 회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회사 근처에서 밥을 사주기도 한다.

●재산 절반 내놓은 김봉진과 김범수


국내 배달앱 1위로 ‘배달의민족’ 창업자인 김봉진(45) 우아한형제들 의장이 연초 자신의 재산을 절반 이상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화제를 모았다. 그의 재산은 배달의민족을 독일 딜리버리히어로(DH)에 매각하면서 받은 주식을 포함하면 1조원 대에 달한다. 수도전기공고와 서울예술대학 실내디자인학과를 졸업한 뒤 디자인 회사 이모션과 네오위즈에 이어 NHN 등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하다가 2010년 자본금 3000만원으로 우아한형제들을 창업했다. 빈손으로 시작해 창업으로 억만장자 반열에 오른 것이다. 어린 시절 화가가 꿈이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예술고에 진학하지 못했다고 한다.


진도의 조그만 섬에서 태어난 ‘¤수저’ 김봉진은 화가가 꿈이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자본금 3000만원으로 우아한형제들을 창업해 1조원의 잭팟을 터뜨렸다. 사진 우아한형제들


그가 기부를 결심한 이유다.

“기부 서약은 제가 쌓은 부가 단지 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넘어선 신의 축복과 사회적 운에, 그리고 수많은 분들의 도움에 의한 것임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아주 작은 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는 손님들이 쓰던 식당 방에서 잠을 잘 정도로 넉넉하지 못하던 가정 형편에 어렵게 예술대학을 나온 제가 이만큼 이룬 것은 신의 축복과 운이 좋았다는 것으로 밖에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존 롤스의 ‘최소 수혜자 최우선 배려 원칙’에 따라 그 부를 나눌 때 그 가치는 더욱 빛난다”면서 앞으로 교육 불평등 문제 해결과 문화예술 지원, 자선단체 지원 등을 구상하고 있다. 어린이날을 맞아 저소득층 학생 1만 명에게 150억 원어치의 노트북을 선물하면서 “노트북은 옛날로 치면 참고서와 같이 학생들에게 중요하다”고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은 최근 ‘브라이언임팩트’라는 재단 설립을 신청하고 자신의 재산 10조 원 중 절반 이상을 카카오가 감당하지 못하는 사회문제 해결에 쓰겠다고 밝혔다. 사진 카카오



카카오를 창업한 김범수(55) 이사회 의장도 연초 카카오 임직원에게 보낸 카톡 메시지를 통해 “재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다짐하게 됐다”며 카카오가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의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사람을 찾고 지원해 나가겠다고 했다. 김범수는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재단법인 ‘브라이언임팩트’ 설립을 신청했다. 사내에서 쓰는 영어 이름인 ‘브라이언’과 카카오가 2018년 설립한 사회공헌재단 ‘카카오임팩트’를 조합해 만든 이름이다. 재산이 10조원을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김범수는 재단 설립을 위해 카카오 주식 432만 여주를 매각해 5000억원의 현금을 마련했다.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과 디지털 교육 격차로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인공지능(AI) 인재 육성 등에 사용할 계획이다.


●그들을 ‘신인류 재벌’이라고 부르는 까닭

장병규 김봉진 김범수는 부모로부터 한 푼도 물려받지 않고 빈손으로 창업해 성공한 이른바 IT(정보기술) 업계의 ‘청년 재벌’들이다. 삼성 SK 현대차 LG 등 한국의 경제 성장과 궤를 같이 한 대기업과는 태생이 다른 신흥 벤처기업인이다. 엄청난 부를 일구기 위해선 고비마다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역경과 시련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민영화됐지만 포스코(옛 포항제철)와 KT(옛 한국통신)는 한국의 대표 공기업으로 박정희 정부의 조국 근대화 사업과 국가기반 산업 지원 정책에 따라 굴지의 회사로 우뚝 섰다. 박근혜 대통령은 포스코와 KT에 인사 청탁이 들어오고, 예산을 낭비하는 것에 대해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세우고 키운 회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지 않은 국민들이 재벌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다. 이들이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사회적 책임에 대한 기대 또한 가볍지 않다.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은 최근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과 김범수 카카오 의장 등 IT(정보기술) 업계의 이른바 ‘창업 재벌’을 부회장으로 영입해 체질 개선에 나섰다. 사진 동아일보DB


한국의 경제성장과 번영을 이끈 대기업들은 공과 함께 과도 없지 않았다. 총수에 몰리는 권한의 집중과 시장독과점 문제, 불투명한 지배구조 등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3세, 4세까지 이어지는 경영권 승계에 따른 논란과 무거운 상속세로 세대가 바뀔수록 경영권 이전이 쉽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재벌이라는 이유로 욕을 먹는 일도 다반사다. 이는 세금 문제와 함께 종종 발생하는 총수의 횡령 배임 의혹 등도 무관치 않다.


●‘소셜 임팩트’ 있는 청년 기업인이 만드는 미래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직원에게, 그리고 사회에 내놓겠다는 신흥 벤처기업인들은 과거 재벌과는 다른 ‘신인류’들이다. 사회의 압력에 못 이겨 마지못해 내놓는 듯 하는 과거의 재벌 모습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거액의 돈을 내놓으면서 구체적으로 용처는 어디에,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쓸지를 콕 집어 제시한다. 그리고 아낌없이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큰 돈을 쾌척한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가 2016년 6월 인스타그램 월 사용자 5억 명 돌파를 자축하며 찍은 사진. 사진 마크 저크버그 페이스북


‘신인류 재벌’은 40대 중후반 젊은이들이기에 악착 같이 모아 아들, 딸에게 대를 이어 물려주겠다는 상속 의지는 크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미래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사회적 가치에 관심을 쏟는다. 대한상공회의소를 이끄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장병규 김범수 같은 청년 창업자들을 부회장단으로 영입한 것도 고무적이다. 경제단체가 재계 이익만 도모한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사회에서 존경 받는 ‘신인류 재벌’들이 많아지면 한국 사회도 한 걸음씩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이제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나 페이스북을 일군 마크 저커버그 같은, 사회에 임팩트 있는 기업인들을 가질 때가 됐다.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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