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한 땅의 기운-가슴엔 푸근함…구례 화엄사를 빛낸 고승들

동아일보

입력 2021-05-14 22:24 수정 2021-05-15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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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과 영남에 걸쳐 있는 지리산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립하던 삼국시대에 어느 한 나라가 온전히 차지해본 적이 없던 땅이다. 지리산 자락은 각 나라 백성들이 삶의 터를 공유하는 무대였다. 정치적 압박이나 관리의 횡포, 전쟁 등 환란(患亂)을 피하려고 찾아드는 사람들을 품어주는 포용의 산이기도 했다.

그 중심지가 전남 구례군이고, 지리산의 넉넉한 품처럼 화합과 관용의 정신을 실천해온 곳이 구례 화엄사라 할 수 있다. 지리산 노고단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화엄사는 불교 경전인 ‘화엄경’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는 사찰이다. 화엄경은 세상 사람들에게 대립과 항쟁 대신 화합과 통합을 가르친다.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화엄 사상의 무대인 구례를 찾았다.

섬진강이 휘감아 돌아가는 모습의 구례군 전경. 산과 강과 마을이 조화를 이뤄 풍광이 아름답다.


○ 너그러이 포용하는 땅 ‘구차례’
구례는 북쪽으로는 전북 남원, 서쪽과 남쪽으로는 전남 곡성 광양 순천, 동쪽으로는 경남 하동과 접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구례군 석주관성(토지면 송정리)이 영남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길목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7세기 후반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영·호남 만남의 길목인 구례를 주목했다. 여기에는 불교가 큰 역할을 했다. 백제인들이 많이 살던 구례를 무대로 의상대사(625~702) 등 신라 승려들은 화엄 사상을 펼쳤다. 우주의 모든 사물과 사단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가 원인이 돼 일어나는 것이며, 결국 대립을 초월해 하나로 융합한다는 ‘법계연기(法界緣起)’론이 핵심이었다. 갈라진 나라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논리로 백제 망국민들을 토닥거렸을 것이다.

구례는 지리적으로도 화엄 사상을 펼치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조선 후기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람 사는 곳에 경치가 아름답고, 물산이 풍부하여 소출이 넘쳐나면, 인심 또한 자연스레 넉넉해진다”고 하면서 “구례는 이 세 가지(경치, 물산, 인심)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고 기술했다. 한반도 각 지역에 대한 ‘명당 점수’를 매기는 데 있어 다소 인색했던 이중환조차 극찬한 땅이 구례였다.

노자의 가르침에 ‘인법지(人法地·사람은 땅을 본받음)’라는 말이 있다. 땅이 넉넉하면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심성도 여유롭고 푸근해진다. 백제 시절 구례가 구차례(求次禮)로 불린 설화에서도 이런 흔적이 나타난다. 백제 시대에 사이가 좋지 않던 두 정승이 있었다. 성격과 생각이 너무 다른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며 싸웠다. 그러다 한 정승이 먼저 벼슬에서 물러나 구례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다른 정승도 은퇴 후 말년을 보낼 거주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두 정승은 구례에서 우연히 만나게 돼 구원(舊怨)을 풀고 함께 노년을 보내기로 했다. 두 정승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백제 왕은 ‘원수가 서로 예를 찾은 곳’이라는 의미로 ‘구차례’라는 지명을 지어주었다고 한다.(‘전남의 전설’에서)


○화엄사를 빛낸 고승들
산 좋고 물 맑은 곳이 명당이라는 말을 느껴보기 위해 화엄사 산내 암자인 연기암(560m)을 먼저 찾았다. 노고단 중턱쯤 자리한 이곳에서 조망해본 구례는 지리산의 굳센 땅 기운과 섬진강의 풍요로운 기운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했다. 특히 하동으로 흘러나가는 섬진강 줄기가 구례를 휘감아 도는 모습은 낙동강이 안동 하회마을을 감싸듯 돌아나가는 것과 흡사하다. 산과 강과 마을이 빚어낸 아름다운 풍광을 보기 위해 일부러 연기암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산수가 아름다우면 사람도 아름다워진다. 이 지역 출신 장길선 전(前) 구례군교육장은 “구례는 외지인들에 대한 편견이나 텃세가 거의 없는 편이어서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편안히 살기에 좋다”고 말했다.

연기암에서는 구례군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다. 오른쪽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마니차가 보인다.

연기암은 본사인 화엄사와 밀접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544년 화엄사를 창건한 서역 출신 승려 연기조사가 맨 처음 수행하던 토굴 터가 연기암이라는 것이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깊은 산속에 숨겨진 명당 터를 콕 짚어 수행 터전으로 삼은 솜씨를 보면 도력이 높은 수행자임은 분명해 보인다.

연기조사가 창건했다는 연기암 터에 세워진 관음전.

연기암은 임진왜란 등 전쟁 통에 소실된 후 오랜 세월 묻혀 지내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복원 작업이 이뤄져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초대형 문수보살상과 국내 최대 규모의 마니차(불교 경전을 넣어둔 원통형의 신앙도구)가 자랑거리인 연기암에서 화엄사로 연결되는 산책로(2km)는 ‘치유의 숲길’로도 유명하다. 계곡 물에서 방출하는 음이온과 숲에서 뿜어 나오는 피톤치드가 풍부해 건강을 챙기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코스라고 한다.

산책로를 따라 내려와 화엄사로 들어서니 경내는 마치 큰 행사를 앞둔 듯 분주했다. 화엄사 주지 덕문스님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대웅전에 모신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이 국보로 지정 예고되는 경사까지 겹쳐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화엄사상에 기반 해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의 삼신불(三身佛)로 구성된 이들 목조 좌상은 3m가 넘는 초대형 불상으로 앞서 2008년 보물로 지정됐다. 조선 왕실 사람들과 승려 580명 등 총 1320명이 시주에 참여해 조성한 이 불좌상은 17세기 불교 사상과 미술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화엄사 대웅전. ‘大雄殿’이라고 쓰인 한문 편액은 선조의 왕자이자 인조의 숙부인 의창군이 써준 글씨다.

그런데 대웅전 삼신불 조성에는 화엄사가 겪은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1592년 왜군이 도발한 임진왜란과 1597년 2차 전쟁인 정유재란으로 온 국토가 전란(戰亂)에 시달릴 때 화엄사 승려들은 승병(僧兵)을 조직해 왜군에 대항했다. 화엄사의 윤눌 대사는 조선 수군에 가담해 이순신 장군을 도왔고, 진주성 전투에도 참가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정유재란 때는 화엄사 주지 설홍대사가 300여 승군을 이끌고 구례 의병들과 함께 요충지인 석주관에서 왜군들과 장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압도적인 왜군 군사력 앞에 승군들은 모두 전사했다.

이후 화엄사 승려들에 대한 왜군의 보복은 잔인했다. 화엄사를 잿더미로 만들고 승려들을 학살했다. 지리산 골짜기 이곳저곳에 숨은 듯이 있던 작은 암자들까지 찾아가 불 질러 없애버렸다. 그만큼 화엄사 승려들은 왜군들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던 것이다. 덕문 주지 스님은 “각황전의 사방 벽을 장식했던 신라 시기의 석경(石經; 돌에다 화엄경을 새겨놓은 경전)들도 그때 상당 부분 훼손되거나 왜군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면서 “일본 교토박물관측은 당시 건너간 석경의 존재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안하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파괴된 화엄사 중창은 1630년대 벽암대사에 의해 이뤄진다. 승병으로서 뛰어난 활약을 한 벽암대사는 조선 정부로부터도 공로를 인정받아 ‘팔도도총섭’이라는 직책을 부여받은 뒤 사찰 중창에 힘을 쏟았다. 대웅전에 걸려 있는 ‘大雄殿’과 일주문의 ‘智異山 華嚴寺(지리산 화엄사)’ 한문 편액은 당시 화엄사의 위격(位格)을 말해준다. 이 편액은 선조의 왕자이자 인조의 숙부인 의창군이 써준 글씨인데, 숭유억불(崇儒抑佛) 체제에서 눌려 있던 불교가 전쟁 이후 위상이 높아졌음을 상징한다.

화엄사는 국보 및 보물급 문화재들이 즐비하다. 사진 앞에서부터 차례로 동사자석탑(보물), 서사자석탑(보물), 각황전 석등(국보), 각황전(국보)이 보인다. 오른쪽 연등이 있는 곳이 대웅전이다.

화엄사는 대웅전 외에도 국보 및 보물급 문화재들이 즐비한 곳이다. 경복궁 근정전을 연상시키는 듯한 웅장한 목조 건물인 각황전(국보 제67호)과 각황전 앞의 초대형 석등(국보 제12호), 각황전 뒤쪽 언덕배기의 4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은 국보급 문화재이고, 대웅전 동오층석탑과 서오층석탑, 원통전 앞 사자탑 등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 사성암에서 만난 도선국사
화엄사를 뒤로 하고 화엄사 말사중 하나인 사성암으로 갔다. 구례군 문척면 읍에서 오산(541m) 정상에 자리한 사성암 역시 화엄사 창건주인 연기조사가 조성한 곳이라고 한다. 원래는 산 이름을 따 오산사(鼇山寺)로 불렸으나, 이후 신라의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신라 말기의 도선국사, 고려의 진각국사 등 4명의 고승이 수행한 곳이라 하여 사성암이라고 불렸다.

구례군 사성암 내 돌벼랑에 세워진 유리광전 법당. 풍수적으로 명당 혈에 세워진 이 법당이다.

사성암은 영험한 기도처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지난해 여름 집중호우로 구례 지역이 피해를 입었을 당시 10여 마리의 소 떼가 침수된 축사를 피해 사성암 꼭대기의 유리광전 앞마당으로 몰려와 목숨을 건져 화제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이런 일화 때문인지 사성암은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신라말 도선국사가 수행했던 곳이라고 해서 ‘도선굴’(왼쪽)으로 불리는 석벽 동굴을 관광객이 살펴보고 있다.

명당인 사성암은 우리나라 풍수지리설의 원조로 유명한 도선국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그가 사성암내 석벽 동굴(도선굴)에서 수행하면서 풍수지리설을 깨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선은 이곳에서 한 이인(異人)을 만났다고 한다. 이인은 그에게 풍수지리에 대한 이치를 얘기하고 마을 앞 강변에다 모래로 산천을 그리고 사라졌다. 도선은 이후 모래 그림(沙圖)에서 산천지세(山川地勢)를 보고 풍수의 원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사성암 인근에 사도리(沙圖里)라는 마을도 있다. 즉 구례군 사도리는 우리나라 ‘도선 풍수’의 출발지이자 전승지인 것이다.

사성암 근처의 섬진강 대나무 숲길. 구례군민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산책 코스다.

구례는 역사적 인물과 전설적 스토리가 풍부한 곳이다. 그런 한편으로 곳곳에 힐링 명소가 있다. 사성암 근처의 섬진강 대나무 숲길과 천은사의 소나무 숲길 및 상생의 길 등은 평소 구례 사람들도 즐겨 찾는 산책길이다. 이런 친환경적인 길을 걷다 보면 구례의 아늑하고도 평안한 땅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 듯한 느낌도 맛볼 수 있다.


화엄사 주지 덕문스님 “화엄의 땅에서 상생 공동체 문화 모범 보일 것”

화엄사 덕문스님


화엄사 경내 한쪽엔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지지한다’는 플래카드가 있다. 화엄사는 조계종 교구본사 가운데 최초로 미얀마 민주화운동 지지 성명을 냈다. 부처의 가르침을 권력 같은 상위가 아닌 대중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듯하다. 이를 주도한 화엄사 주지 덕문스님은 ‘화엄의 땅’ 구례에서 화엄의 이상향인 상생 공동체를 구현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특히 지역사회와의 상생을 강조하는 그를 만나보았다.

-구례와 화엄사의 상생을 실천한 사례라면?

“과거 구례는 화엄사를 찾는 관광객들 덕분에 인구가 늘고 번성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화엄사 주지로 부임(2017년)한 후 구례군민들이 화엄사 말사인 천은사 입장료 때문에 욕을 먹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 마음이 아팠다. 지리산 노고단에 오르려면 천은사 매표소에서 1인당 문화재구역 입장료를 내야 했다.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 자체가 사찰 소유의 사유지이기 때문에 천은사로서는 불법적으로 입장료를 받는 게 아니었지만 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도 있었다. 그래서 구례가 인색한 동네가 아니며, 또 구례군민의 자존심을 회복해 드리고 싶어서 입장료를 폐지했다. 이 때문에 천은사 살림살이가 좀 어려워지긴 했지만 천은사가 국민과 군민들의 사랑을 받는 곳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화엄사 터가 명당인 데다 구례 땅 자체가 포근하면서도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통일신라 시기에 동서화합을 위한 화엄사상을 펼치기에 가장 좋은 지역이 구례였다. 영남과 호남의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특성, 좋은 터의 기운 등에 힘입어 화엄사가 그 역할을 중심적으로 수행했다. 과거에 그랬듯이 화엄사는 동서화합 뿐 아니라 보수와 진보의 상생 문화 등을 구축하는 데 힘쓰고 있다. 현재도 화엄사는 경북 영천 은해사와 자매 인연을 맺고 꾸준히 교류한다. 화엄사 주지로 부임하기 전 동화사 주지로 봉직한 인연 때문인지 대구 경북 지역 불자들이 자주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사람들이 오가다 보면 소통과 상생의 마음이 절로 생기게 마련이다.”


-화엄사가 중점적으로 염두엔 두고 있는 일은?

“화엄사 각황전을 장식했던 ‘화엄 석경(石經)’을 복원하는 일이다. 경전을 종이에 옮겨 쓴 사경(寫經) 작품은 많지만 돌에다 음각한 석경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파괴된 석경 1만3000여 점의 파편이 현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는데 이를 세상에 드러내 우리의 우수했던 석경 문화를 알리고자 한다. 중국의 방산 석경이 우리의 화엄 석경보다 조잡한 것을 보고 그런 사명감이 들었다. 한편으로 그간 잊힌 사경(寫經) 수행문화도 널리 보급하고자 한다. 사경은 신앙적으로 공덕을 쌓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수행의 훌륭한 방편이기도 하다.” <끝>


구례=안영배 기자 · 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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