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나면 외부단체가 “재해기업” 낙인… 기업들 산재 신고 꺼려

박성민 기자

입력 2021-05-07 03:00:00 수정 2021-05-07 09:28:26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현장과 겉도는 산업안전정책] <2>드러나지 않는 산업재해 실태


지난해 국내에선 산업재해(산재)로 근로자 1만 명당 57명이 다치고 0.46명이 숨졌다. 부상자와 사망자 비율을 보면 다른 국가와 다른 점이 있다. 2018년 기준 독일은 부상 240명, 사망 0.14명, 미국은 부상 217명, 사망 0.34명이다. 국내 근로자가 더 적게 다치지만 많이 숨지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드러나지 않는 산재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유는 복합적이다. 근로자는 복잡한 산재 신청 절차가 버겁고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두렵다. 사업주는 산재 보험료 인상과 근로감독 등이 꺼려진다. 또 질병이나 과로사로 의심되는 사례가 생기면 근로복지공단이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재해 기업’으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산재 신고를 제대로 하는 기업이 되레 피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산재 신고는 재해 예방의 첫걸음”이라며 “기업이 산재 신고를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유인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재해기업’ 여론몰이가 은폐 유혹”
올 초 국내 중견기업에서 일하는 근로자가 숨졌다. 그러자 관련 산별노조 지부는 성명서를 내고 “고도한 업무 강도로 인한 명백한 과로사…사회적 타살”이라고 주장했다. 산재 판정은 근로복지공단 질병판정위원회에서 객관적 사실과 과학적 근거에 따라 내려야 함에도 여론몰이부터 시작한 것이다. 이 기업은 업무상 사고 및 질병에 의한 근로자 사망 사례가 동종업계 다른 업체보다 현저히 적고, 산재 신고 또한 올바르게 했음에도 여론전의 제물이 된 셈이다.

이처럼 근로자가 질병이나 뇌심혈관 질환 등으로 숨지면 피해자와는 무관한 외부 단체 등이 섣불리 산재나 과로사로 규정해 비난을 퍼붓는 것이 기업에는 큰 부담이다. 이 때문에 근로자의 산재 신청을 하지 말도록 회유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업 관계자는 “산재 인정은 질병판정위원회 등의 객관적인 검증을 거쳐 이뤄지는데, 일부에선 판정 전부터 질병이나 사망 원인을 무조건 기업 탓으로 돌린다”며 “이는 기업이 산재 처리에 소극적으로 대처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다른 기업 관계자는 “이들 외부 단체는 사실과 (산재) 판정 결과에는 관심이 없다”며 “남는 것은 사회적 비용과 갈등뿐”이라고 주장했다.

사업주들은 산재 예방을 위한 지원보다 처벌이나 불이익만 강화하는 것도 불만이다. 산재 보상은 ‘무과실 책임주의’ 원칙이다. 고의성이나 범법 행위가 없는 한 근로자의 과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보상한다. 사업주가 전액 부담하는 보험료는 그에 따라 오른다. 박소민 노무법인 와이즈 대표는 “안전 조치를 잘 갖췄거나 산재 처리를 잘한 사업장에는 보험료 인상 폭을 깎아주는 등 인센티브를 통해 산재 신청을 양성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 아프고 다쳐도, 산재 신청은 39%만
경남 창원의 한 공장에서 일하는 김모 씨(41)는 작업장에서 미끄러져 허리를 다쳤다. 산재 신청을 하려 했지만 사업주는 “공상(회사와 보상을 개별 합의) 처리하면 치료비를 전액 보상하고 생활비도 주겠다”며 말렸다. 김 씨는 고민 끝에 받아들였다. 하지만 쉬는 날이 한 달을 넘고 치료비가 불어나자 사장은 병원비 지급을 미뤘고, 생활비도 약속한 금액의 절반만 지급했다. 김 씨가 산재 신청을 하겠다고 하자 회사는 퇴사를 종용했다. 한국의 산재 통계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이유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2018년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용역을 받아 진행한 ‘산업재해로 인한 건강보험 재정누수 방지 방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 산재 신청 비율은 38.9%에 그쳤다. 32.6%는 공상으로, 15.1%는 건강보험, 자동차보험 등 민간보험으로 보상을 받았다. 근로자가 산재 처리를 하지 않는 이유로는 ‘회사로부터의 불이익이 두렵다’(74.5%)가 가장 많았고, ‘입찰 등에서 회사가 불리해질 수 있어서’가 63%로 뒤를 이었다. 60.7%는 ‘산재 처리에 대한 조직 문화가 부정적’이라고 했다.

○ 5년간 254억 원, 건보 재정으로 충당


일하다 다친 근로자는 산재의 업무 연관성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산재 신청을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산재 신청을 하려면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이때 사고나 발병 전 의무기록을 요구받기도 하고, 사고 증거도 직접 모아야 한다. 건물 청소 일을 하던 박모 씨(56·여)는 “계단을 오르다가 무릎을 다쳤지만 일을 쉬면서까지 제출 서류를 떼기 위해 돌아다니는 게 부담스러워 산재 신청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2019년 기준 질병 산재 인정률은 64.6%로 2016년(44.1%)보다 20%포인트 이상 올랐지만 근로자에게는 여전히 산재 보상 절차가 멀게 느껴진다.

산재 신고가 누락되면 건강보험이 그 부담을 진다. 건보공단이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적발해 환수한 건보급여는 약 254억 원. 매년 3000명 이상이 산재보험 대신 건강보험으로 치료비를 낸 것이다.

산재 처리가 더 투명해져야 한다는 데는 경영계나 노동계 모두 이견이 없다. 김광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산업안전연구소장은 “산재 인정 후 지급되는 휴업급여로 급여의 70%만 받는 게 싫어 산재 대신 공상 처리를 선호하는 경우도 많다”며 “보상 수준을 높이고, 산재 다발 사업장인 50인 미만 기업의 산재 예방 지원과 관리 감독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英, 사업장별 위험 관리… 예방에 초점
獨, ‘산재의사’가 치료-요양 수준 판단
해외 산업재해 감소 비결은

산업재해를 효과적으로 감소시킨 국가들의 비결은 뭘까. 사고 후 처리 또는 보상만큼이나 예방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영국은 산업재해 억제와 관련해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국가다. 2008년부터 산재 사고 사망자는 200명 이하로 떨어져 2018년에는 147명이었다. 근로자 1만 명당 사망자는 0.045명으로 한국의 10분의 1 수준이다.

내년부터 국내에서 시행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영국이 2007년 도입한 기업과실치사법을 모델로 한다. 이 때문에 강력한 형사적 처벌이 산재 감소의 배경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산재 사망자 감소는 수십 년간 이어지는 흐름이었을 뿐, 법 시행의 효과는 불명확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영국이 산재를 억제하게 된 비결에는 철저한 예방 노력이 있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지난해 발간한 ‘주요 국가 간 산업재해율 변화 추이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은 2008년부터 ‘이해 관계자 참여를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로드맵을 세우고 사업주와 근로자, 자영업자 등의 협력을 강화했다. 사업장별 중점 관리 요소를 발굴하고 중소기업의 안전 보건 역량을 높이는 데 지원을 집중했다.

독일에서는 일하다 다친 근로자가 산업재해를 입증하기 위해 회사 눈치를 보거나 얼굴을 붉히는 일이 드물다. 산업별, 지역별 재해보험조합에서 산재 처리를 전담하기 때문이다. 재해보험조합이 의료진의 보고를 바탕으로 산재 여부와 보상 수준 등을 결정한다. 노사 동수로 구성돼 산재 판단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우려도 작다.

이를 위해 독일은 산재 근로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보고하는 ‘산재 의사’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산재 근로자는 반드시 산재 의사의 진단을 받고 치료 및 요양 수준을 판단 받아야 한다. 재해가 경미해 일반 의사에게 치료받더라도 치유 경과는 산재 의사에게 확인받도록 돼 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관련기사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