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차 악역 전문 배우가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김기윤 기자

입력 2021-04-30 03:00 수정 2021-04-30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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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파묻힌 아이’ 닷지 역 손병호
아내-아들 사이 태어난 생명 죽이고 30년 뒤 자신의 죄 고백하며 속죄
“가정 지키려는 가장… 복합적 인간상” 데뷔작 ‘성극’부터 악역 맡아 열연
TV-무대 오가며 악한 연기 선뵈지만 유쾌한 입담에 ‘예능 블루칩’ 조명


극 중 ‘닷지’ 역할로 분장한 손병호의 모습. 어딘가 괴이하고 섬뜩한 캐릭터를 표현했다. 경기아트센터 제공

근친상간, 살인, 매장….

연극 ‘파묻힌 아이’에서는 차마 입에 담기 꺼려지는, 상상조차 버거운 일들이 1970년대 미국의 한 가정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어머니 ‘핼리’와 첫째 아들 ‘틸든’의 충동적 관계로 태어난 한 아이. 이 생명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집안의 가장 ‘닷지’는 아이를 죽여 뒷마당에 매장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흘려보낸 30년. 외부인 ‘셸리’가 이 가정을 방문하면서 가족들은 비로소 쓰디쓴 진실과 마주할 상황에 놓인다. 세상은 과연 이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줄까.

비극의 정점에 선 닷지는 죄를 범하고, 끝내 고백하는 인물. 타고난 이야기꾼, 배우 손병호(59)가 배역을 맡아 끔찍한 서사를 펼쳐낸다. 21일 경기 수원시 경기아트센터에서 만난 그는 ‘40년차 악역 전문 배우’답게 “대본을 보자마자 재밌을 것 같았다. 해석, 연기에 따라 참담한 비극 또는 희비극이 될 수도 있는 여지가 있어 매력적”이라고 했다. 이어 “출연료까지 제대로 받으면서 꿈꾸던 작품에 설 수 있으니 진짜 감사한 일”이라며 웃었다.

작품은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인 한태숙 연출가가 맡았다. 국내에선 처음으로 선보이는 라이선스 극이다. 원작은 미국의 유명 배우이자 극작가인 샘 셰퍼드가 썼다. ‘가족 3부작’으로 불리는 시리즈 중 두 번째인 이 작품으로 그는 1979년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을 수상했다. 강렬하고 야만적인 무대 언어가 작품의 특징. 원시적이면서 무책임한 인물 군상을 통해 가족 붕괴와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을 말한다. 배우 예수정이 어머니 ‘핼리’를 연기한다.

21일 경기 수원시 경기아트센터에서 만난 손병호는 “변신은 늘 행복하다”고 했다. 특히 “극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나를 본 사람들이 ‘아까 그 역할이 너였냐’고 할 때마다 짜릿하다”고 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무대, 스크린, 브라운관을 오가며 일명 ‘악마력’을 쌓은 손병호에게도 배역은 결코 만만찮다. 무대 중앙의 소파에 앉았다 기댔다 누우면서 절대 소파를 벗어나지 않는다. 소파는 그가 지키려는 가정의 권위와 권력을 상징한다. 손병호는 “생명을 유기한 뒤에도 가장으로서 끝내 가정을 부여잡으려 한다. 한편으론 모두 속죄해 털어버리고 새 시작을 바라는 복합적 인간상”이라고 했다. 번역극 특성상 “대사마다 어감, 문맥이 잘못 표현되지 않도록 매일 동료, 제작진과 토론하는 게 숙제”라고 했다.

현실에서도 수많은 비극이 속보로 쏟아지는 시대. 굳이 무대 위에서도 우리가 이 이야기를 봐야 하는 이유는 뭘까. 그는 “현실 속 ‘정인이 사건’이든 극 중 영아 유기든 인간성 말살의 핵심에는 자본주의의 폐해가 있다. 돈 앞에선 가족도 해체되고 도덕과 규범도 쉽게 묻어버리는 게 현실”이라고 짚었다. “비극의 끝까지 치달아봐야 화해도 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81년 극단 ‘거론’을 시작으로 ‘목화’에서 줄곧 무대에 올랐던 그는 첫 작품인 성극(聖劇) 무대를 떠올리며 “이상하게 그때부터 악역이었다”고 털어놨다. 이후 연극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블루사이공’ 등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척하지 말자”는 게 그의 연기 지론. 다만 “정답은 없기 때문에 10명 중 7명이 연기에 공감하면 잘하는 게 아니겠냐”고 답했다.

짐승 같은 연기를 벼르는 그는 사실 무대 밖에선 누구보다 유쾌한 이야기꾼이다. 넘치는 끼와 에너지를 발산하는 긍정적 모습이 조명 받으며 ‘예능 블루칩’으로도 통했다. 스스로 “광대 역할은 배우인 제 삶의 목적이자 이유”라고 했다. 그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모두가 즐거워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다고 털어놨다. “국민적 술자리 게임이 된 ‘손병호 게임’도 그래서 탄생한 게 아닐까요.”

5월 27일부터 6월 6일까지 경기아트센터 소극장. 3만, 5만 원. 14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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