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논점/허진석]퇴직연금 운용, 사전 지정하면 수익 향상 기대… 안전성은 논란

허진석 논설위원

입력 2021-04-28 03:00 수정 2021-04-28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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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형 '디폴트 옵션' 도입 논의

허진석 논설위원
《국회가 수익률 제고 방안에 초점이 맞춰진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 논의를 본격화한다.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소위는 28일 퇴직연금 제도 개선을 위한 전문가 간담회를 열고, 입법에 속도를 낸다는 계획이다. 확정기여(DC)형에는 ‘디폴트 옵션(사전 지정 운용) 제도’를, 확정급여(DB)형에는 ‘투자 일임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핵심이다. 디폴트 옵션은 가입자의 운용 지시가 없으면 미리 지정된 상품에 자동으로 투자하는 방식이고, 투자 일임은 사용자(기업)에게 퇴직연금 위탁 운용을 허용하는 것이다. 간접적이나마 퇴직연금의 수령액이 달라질 수도 있는 새 제도 도입 논의가 막 시작되고 있다. 》

퇴직연금 수익률은 연 1%대
2005년 12월 퇴직급여보장법 시행으로 시작된 퇴직연금은 2020년 말 기준으로 적립금이 255조5000억 원으로 늘었다. 매년 15% 전후로 적립금이 늘면서 그 규모가 126조 원에서 2배로 커진 것이다. 전 국민이 가입한 국민연금 855조 원의 30%에 달하는 규모다.

규모는 커지는데 수익률이 낮아 문제다. 수익률이 낮으면 노후 안전장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퇴직연금의 최근 5년간 연 환산 수익률은 1.8%대로 국민연금(5.3%)보다 낮다. 적립금의 대부분(86.1%)인 219조9000억 원이 원리금 보장 상품에 가입돼 있고, 실적배당 상품에는 10.7%(27조4000억원)만 투입돼 있는 상황과 무관치 않다.

그나마 DC형 가입자는 여러 투자 상품을 선택해 수익률을 높일 수 있지만, 금융지식 부족과 무관심 등으로 적립금 67조2000억 원의 83.3%인 56조 원을 원리금 보장 상품에 넣고 있다. 이율이 가장 낮은 예금에 넣어두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4월 현재 DC형 적립금의 절반가량(50.4%)이 금리가 0.72%에 불과한 은행 예금에 들어있다. 근로자가 퇴직연금 사업자(은행, 증권사, 보험회사 등)에게 “저축은행에 넣어 달라”와 같은 명확한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저축성 상품 중에서도 금리가 낮은 은행 예금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금융투자업계는 보고 있다.

기업이 운용을 책임지는 DB형도 손실에 대한 부담 때문에 적립금의 대부분(95.5%)을 원리금 보장 상품으로 운용하고 있다. 2019년 현재 위탁운용 비중을 40.5%까지 늘린 국민연금의 수익률은 11.3%로 2.3%가량인 퇴직연금의 약 5배에 달한다.

‘예금 상품’ 옵션 도입 논란
디폴트 옵션은 DC형에 새로 가입했거나 기존 투자 상품이 만료된 가입자가 투자 상품을 선택하지 않는 특수한 경우에 적용된다. 4주 이내에 새 상품을 선택하지 않으면 사전에 가입자나 사용자(기업)가 정한 상품에 투자됨을 통지하고, 그럼에도 2주 내에 운용 지시가 없으면 해당 상품에 투자된다.

관건은 디폴트 상품(사전 지정 상품)에 원리금이 보장되는 저축성 상품을 넣느냐는 것이다. 안호영 의원이나 김병욱 의원 등 더불어민주당 안에는 실적배당 상품만 있고,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의 발의안에는 저축성 상품도 있다.

수익률 제고 취지에 맞추려면 디폴트 상품에 저축성 상품은 넣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미국이나 호주 등이 그런 방식으로 연 7%의 수익률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 근거로 제시된다.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를 회원으로 두고 있는 금융투자협회 측은 “가입자가 상품 선택 때 예금을 선택할 기회가 있는데, 운용 지시가 없을 때 다시 넣는 것은 수익률 제고를 위한 제도 개선 취지를 무색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도 가입자의 운용 지시가 없을 때는 저축성 상품에 자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반면 생명보험협회와 은행연합회 등은 퇴직연금이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임금 성격이 강해 원리금에 대한 보장이 확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명보험협회 측은 “퇴직 시기에 주식 시장의 변동성이 크게 되면 예금에 넣어둔 것만 못한 효과를 볼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계층 간 불평등 문제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윤석명 한국연금학회장은 “디폴트 옵션이 도입되면 금융지식이 부족하고 직장을 자주 옮겨 다녀야 하는 근로자는 상대적으로 이전보다 높은 위험에 노출되는 점 등 소득 계층 간의 불평등 문제도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디폴트 상품 수수료 낮춰야
여야 모두 디폴트 옵션 도입 자체에는 이견이 적어 앞으로 연금시장에는 디폴트 상품이 새로 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자산운용사들이 미국에서 인기 있는 타깃데이트펀드(TDF) 형태로 엄선한 새 상품을 내놓을 수 있다. TDF는 만기에 가까워질수록 안전자산 비중을 높여 수익성과 안정성을 같이 추구하는 상품이다.

디폴트 상품은 퇴직연금을 적극적으로 운용하려는 DC형 가입자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은 2600여 펀드에서 직접 선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디폴트 옵션이 도입된 이후 디폴트 상품 가입자가 급증했다. 다만, 고양이에게 생선 맡기는 꼴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수수료를 낮추고, 이해충돌을 감시할 수 있는 별도 장치를 갖추는 논의도 필요해 보인다.


미국, 퇴직연금으로 100만 달러 자산 형성 노리기도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스웨덴 이탈리아 뉴질랜드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디폴트 옵션 제도를 이미 도입해 운용하고 있다.

미국은 1981년 DC형 퇴직연금(401k) 제도 시행 때 디폴트 옵션을 도입했다. 2006년 연금보호법 제정 때 디폴트 옵션 투자 손실에 대한 사용자(기업)의 면책 조항이 포함되면서 더 활성화됐다. 미국 가입자는 정부가 지정한 ‘적격 디폴트 상품(QDIA)’을 투자 대상으로 설정하는데, 그중에서 타깃데이트펀드(TDF) 선택 비율이 가장 높다. 연 7%대의 수익률과 주식 활황 덕분에 미국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퇴직연금 내 주식과 펀드 등을 통한 100만 달러 노후자산 형성(401k Millionaire)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호주는 1992년 사용자가 근로자 급여의 9.5%를 의무 적립하는 강제 퇴직연금 제도인 ‘슈퍼 애뉴에이션 제도’를 도입했다. 이때 ‘마이 슈퍼’라는 이름으로 디폴트 옵션을 도입했다.

양국 모두에서 디폴트 옵션 행사 때 선택하는 디폴트 상품(적격 연금 상품)은 전문가에 의해 잘 설계된 대표 상품이라는 인식이 높아 DC형 가입자가 투자 상품 선택 때도 이들 상품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있다.

일본은 대부분의 국가들과 달리 디폴트 상품에 저축성 상품을 포함시켜 가입자가 원금보장형 상품을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퇴직연금제도 유형
1)확정급여(DB·Defined Benefit)형:

기업이 재원을 금융회사에 적립·운용하고 퇴직 시 근로자는 정해진 금액(퇴직 직전 3개월 평균 급여×근속연수)을 받는 방식.


2)확정기여(DC·Defined Contribution)형:

기업이 매년 임금의 12분의 1 이상을 적립해주고, 근로자가 이를 운용해 최종 수령하는 방식.


3)개인형 퇴직연금(IRP):

퇴직한 근로자가 수령한 퇴직금을 운용·관리하거나, 재직 중인 근로자가 DB나 DC 방식 외에 자기 부담으로 추가 적립·운용해 연금 혹은 일시금으로 수령.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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