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사무직 “빨간 머리띠 노조는 그만… 스마트 노조 만들자”

변종국 기자

입력 2021-04-20 03:00 수정 2021-04-20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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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 SNS 대화 들여다보니



“결사항쟁, 투쟁 같은 전투적 단어 쓰지 마세요. 빨간 머리띠 두르고 노동가요 부르는 거 생각납니다.”

“일 안 하고 스마트폰 게임만 하는 사람은 되지 맙시다. 할 일은 하면서 정당한 권리 주장하는 노조 만듭시다.”

사무직 노동조합 설립에 나선 현대자동차그룹 사무·연구직 직원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나눈 대화다. 기존 생산·기술직 주도 노조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이들은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 3곳에 2700여 명, 네이버 밴드에 4400여 명이 모여 노조 설립에 관한 구체적 계획을 나누고 있다.

기존 성과급·보수 체계에 대한 불만을 계기로 노조 설립을 위해 모였지만 이곳에서 ‘투쟁’이라는 단어는 금기어에 가깝다. 상급단체와 연대하자는 제안에는 “강퇴(강제퇴장)시키자”는 말까지 나온다. 과격한 이미지를 벗고 스마트하고 합리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데에 공감하는 모습이다. 노조도 MZ세대(밀레니얼+Z세대)는 다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임시 집행부가 채팅방 참가자 중 개인정보를 공개한 직원 117명을 분석한 결과 30대 직원이 76%, 20대가 12%, 40대가 10%로 대다수가 MZ세대다.

○ “빨간 띠 하지 말자” 투쟁에 거부감
19일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 사무·연구직 직원들은 이달 중 현대차, 기아, 현대모비스, 현대제철 등 회사별 사무직 노조를 설립할 계획이다. 사별로 노조를 설립한 뒤 추후에 그룹 차원의 사무직 통합 노조를 결성할지 논의한다.

현대중공업그룹도 생산직 중심 기존 노조와 별도로 사무직 노조 설립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 사무직 공동행동’ 모임은 이날 1호 선전물을 발행하고 오픈 채팅방 등에서 의견을 모으고 있다.

이들은 파업과 투쟁을 앞세우는 기존 노조 방식에 거부감이 크다. 한 직원이 채팅방에서 “투쟁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고 하자 다른 직원들도 “맞다. 빨간 조끼, 빨간 띠도 하지 말자” “스마트한 이미지의 노조가 됐으면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및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과 연대하자는 의견에도 반감이 높다. 한 참여자가 상급 노조와 연대하자는 주장을 펴자 “민노총 관계자는 나가라” “그동안 기존 노조가 사무직에 뭘 해줬죠?” 등 댓글이 달렸다. 논란이 커지자 사무직 노조 설립을 위한 임시 집행부는 최근 “한노총과 민노총 쪽의 조언은 구하되 한쪽을 선택할 가능성은 낮다”는 공지를 올렸다.

○ “50대 생산직 노조에 편중된 복지 바꿔야”
사무직 노조 임시 집행부는 책임급 이상(과장급 이상)도 조합원으로 받을 계획이다. 기존 노조에서 조합원 자격 자체가 없던 이들이다. “최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듣겠다”는 취지다.

과격성은 지양하지만 ‘어용 노조’가 되겠다는 건 아니다. 불합리한 건 제대로 따지자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주주총회에서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사 측에 묻자” “사무·연구직 의결권 주식을 모아 의결권을 행사하자” 등 의견이 대표적이다. “투명한 노조가 돼서 정정당당하게 사 측에 요구하자” “다른 대기업 사무직과 연대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이들이 회사에 바라는 것에 대해 조사한 결과에서 34%는 ‘성과급 제도 개선 및 기준 불투명’을 지적했다. 조직문화 개선, 복지 개선 등이 뒤를 이었다. 일부 직원은 “회사가 사무직과 별도로 교섭을 할 수밖에 없다는 자료를 모아 분위기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 “생산직 노조 평균 연령은 50대다. 회사 복지가 고연령층에 편중됐다는 걸 알려야 한다” “정년 연장이 주목적인 생산직 노조와 다르게 정당한 보상과 처우를 꾸준히 주장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현대차그룹의 한 5년 차 직원은 “우리가 만들려는 노조는 운동권 노조가 아니다. 합리적이고 공정한 대우만 제대로 해주면 투쟁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변종국 기자 bj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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