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황사 새 주지스님께 날 구제하러 온 부처님이라 했죠”

제주=김갑식 문화전문기자

입력 2021-04-05 03:00 수정 2021-04-05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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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주지 마치고 미황사 떠나 제주 정착한 금강 스님

전남 해남 미황사를 떠나 제주시 원명선원에 정착한 금강 스님은 “미황사에서 열심히 산 만큼 아쉬움은 없다”며 “선원의 참선 프로그램을 지도하고 승가 교육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제주=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전남 해남 미황사 주지로 20년을 지낸 금강 스님(55)이 행낭을 푼 곳은 제주시 원두길의 한 선원이었다. 사숙인 대효 스님(77)이 40년 넘게 참선 프로그램을 운영한 원명선원이다. 선원이 있는 주변의 옛 이름은 화북(和北)이다. 해남에서 쌀을 싣고 처음 도착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강 스님이 미황사를 떠난다는 얘기가 돌자 해남 지역신문에는 3000명이 서명한 ‘달마산에 미황사가 있어 산이 아름답듯이 미황사는 금강 스님이 계셔야 아름다운 절입니다’라는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지난달 25일 제주살이 1개월여의 스님을 선원에서 만났다.


―제주살이는 어떤가.

“1989년 미황사와 첫 인연을 맺은 뒤 30여 년이 흘렀다. 올해 2월 중순 제주로 건너왔으니 아직 잘 모른다. 사숙이 참선재단의 선 프로그램을 맡아달라고 해서 오게 됐다. 살아오신 것 보니 저 이상으로 많은 일을 하셨더라. 한 주 나흘은 서울에 머물며 승가대에서 강의하고, 사흘은 제주에서 지내는 ‘반서반제’ 생활을 하게 됐다.”


―미황사와는 아름다운 이별을 했나.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저 때문에 미황사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생기면 잘 못 산 것 아닌가? 원만하게 잘 마무리됐다.”


―‘주지(住持)는 오도 가도 못하는 기둥 주(柱)자, 주지’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주지에는 더 이상 뜻이 없나.

“아쉬움이 하나도 없다. 미황사 주지를 맡은 뒤 시작한 한문학당, 템플스테이, 참선 수행 프로그램, 괘불재 등이 정착됐다. 도량 정비도 해서 불사(佛事)는 어느 정도 완성했다고 생각한다. 새 주지 스님에게 업무를 인계하면서 ‘당신이 나를 구제하러 온 부처님’이라고 했다. 하하.”


―교수 생활은 어떤가.


“종단의 교육위원과 교육 아사리(阿(도,사)梨·모범적인 스승) 회장을 맡아 승가 교육에 관한 끈을 갖고 있었다. 미황사에서 나오면 승가(僧家) 교육에 매진하겠다고 생각해왔다.”

금강 스님의 승가 교육에 대한 포부는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서옹 스님(1912∼2003)과의 인연, 1994년 종단 개혁에 대한 성찰, 최근 또 다른 개혁이 요구되는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금강 스님은 서옹 스님의 손자 상좌(上佐·제자)가 된다.


―서옹 스님은 어떤 분이었나.

“조금 긴 얘기가 있다. 스무 살 때 경주 남산 사찰에서 지낼 때인데 바위마다 부처님이 새겨져 있어 마주할 때마다 절을 하고 다녔다. 한나절 그렇게 지냈는데 40대 중반의 한 스님이 저를 불러 세우더니 ‘서옹 스님이 도인이신데 열반 전 모시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때 무심코 들었는데 1997년 서옹 스님이 ‘금강 수좌가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어요’라고 하더라.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평화로운 성품(性品)이 있으니 그 마음의 주인이 되면 물질이나 과학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아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게 스님의 지론이었다. 나중에 참사랑수행결사로 이어졌다.”


―서옹 스님은 손자뻘인 스님에게도 존댓말을 썼나.

“그분은 아랫사람에게도 함부로 하는 법이 없으셨다. 3년간 시봉했는데 1997년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일이 생각난다. 스님은 ‘나라가 망하고 수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었는데 우리가 할 일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런데 제대로 답을 못하니 사나흘 꾸중을 듣다 실직자를 위한 4박 5일 단기출가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승가 교육은 어떻게 나아가야 하나.


“팔만대장경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들어낸다)라고 한다. 21세기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맞고 있다. 마음 수행집단을 자처하는 승가가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스님 박사들이 260여 명, 교육 아사리가 60여 명에 이른다. 주지보다는 교육과 상담으로 평생 살아온 분들이 함께 연구하면서 사회적 대안을 내놓고, 여생까지 보낼 수 있는 교육총림(叢林) 또는 불교계의 학술원으로 발전해야 한다.”


―논란에 휩싸였던 혜민 스님과도 각별한 사이다.

“혜민 스님이 일 터진 뒤 2개월 정도 미황사에 머물렀다. 나한전에서 기도하고 법화경을 사경하는 등 시간표를 만들어 수행하면서 지내더라. 본인은 힘들겠지만 수행자의 긴 삶에서 보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제주=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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