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서 오버랩된 작가와 단종의 비극… 삶과 역사 화폭서 만나다

완주=손택균 기자

입력 2021-03-25 03:00:00 수정 2021-03-25 04:4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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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연주의: 리좀이 화엄…’ 전시, 전북도립미술관 7월 25일까지
‘단종 역사화 시리즈’ 서용선 작가, ‘홀로코스트 연작’ 권순철 작가 등
자의식 지향하는 작품세계 선보여


서용선의 아크릴화 ‘계유년 그리기’는 2015년에 밑그림을 그려두고 중단했다가 지난해 말 작업을 재개해 최근 완성한 작품이다. 전북도립미술관 제공
“미술 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서양화’를 뭔가 극복해야 할 숙제처럼 생각했어요. 한국 화단에서 추상미술, 미니멀리즘이 대세를 이뤘을 때도 ‘스토리가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7월 25일까지 전북 완주군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신자연주의: 리좀이 화엄을 만날 때’ 기획전에 참여한 서용선 작가(70)가 기획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강렬한 원색을 사용해 거친 질감의 그늘을 끌어내는 화풍으로 잘 알려진 그는 최근 완성한 ‘단종 역사화 시리즈’ 아크릴화 신작들을 내놓았다.

서 작가가 단종 이야기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86년 개인적인 일로 슬픔에 빠져 지낼 때다. 친구의 권유로 찾아간 강원 영월군 강가에 앉아 단종이 물에 빠져 죽은 사연을 들으며 그 슬픔에 공감했다. 단종 일가의 처연한 삶을 담은 캔버스 한 곳에는 소파에 앉아 상념에 잠긴 작가의 자화상이 섞여 있다.


“다섯 살 때 동생이 죽었어요. 큰외삼촌이 조그만 관을 지게에 올리고 산길을 내려가는 모습을 봤어요.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나이였는데 그 장면은 기억에 또렷이 남았어요. 어른이 돼 겪은 슬픔에 그 옛일과 단종 얘기가 오버랩 되면서 ‘뭔가 그려봐야겠다’ 작정하게 된 거죠. 내 모습은 ‘역사가 주관적 해석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반영해 넣었어요.”

서 작가와 함께 전시에 참여한 가나인(64) 강용면(64) 권순철(77) 정복수(64) 작가는 모두 상업미술계의 유행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의식이 지향하는 작품세계를 구축해 온 이들이다. 전시기획팀은 “예술에 대한 관념보다는 개인의 삶에서 출발하고 다듬어진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가졌다고 평가받는 작가들을 찾아가 참여 의사를 타진했다”고 밝혔다.

권순철의 유채화 ‘홀로코스트’(1992년).
1992년 프랑스 파리에서 완성해 29년 만에 처음 공개하는 권 작가의 ‘홀로코스트’ 연작은 캔버스가 아닌 베니어합판에 그린 유채화다. 권 작가는 “캔버스 살 돈을 마련하기 어려울 때였다.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에 대한 자료사진을 참고한 것”이라고 했다.

“서양에는 왕과 귀족을 그린 그림이 많은데 난 부유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해요. 나 자신이 힘들게 살아와서인지. 6·25전쟁 때 피란기차 짐칸에 쪼그려 앉아 본 강물 위 달빛이 아직 기억나요. 사람 얼굴을 그릴 때는 길에서 노인들 얼굴을 많이 찾아보고 다녔어요. 거칠고 볕에 그을리고 주름이 가득하지만, 주변을 압도하는 의연한 얼굴.”

가나인의 아크릴화 설치작품 ‘삶’(2012년)은 세상살이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가 이탈하기를 거듭하는 인간 군상을 표현했다.
정복수의 유채화 ‘존재학’(1991년).
민속을 담은 고유의 미의식을 탐구해 온 가 작가, 피부라는 가면을 걷어낸 인간 본연의 모습을 충격적 이미지로 표현해 온 정 작가, 관계에 대한 고민을 소형 인두(人頭) 조각 1만여 점에 담아 20년 넘게 연결해 온 강 작가 모두 “서구의 미의식을 흉내 내는” 주류 미술계에 반발해 자신만의 미의식을 땅속줄기(리좀·rhyzome)처럼 확장해온 이들이다.

강용면의 ‘만인보-현기증’(2019년).
작가들의 담백한 인터뷰 영상을 전시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품작 33점 상당수는 높이 3m 이상의 대작들. 마음과 눈이 적잖게 후련해진다.

완주=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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