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중립적 명료함, 4900개 색채

손택균 기자

입력 2021-03-23 03:00 수정 2021-03-23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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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스 루이비통서 리히터展
컬러 패널 11개 버전으로 조합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900가지 색채 버전 9’(2007년).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 제공

예수의 탄생을 축복한 동방박사들의 유골이 안치됐다고 알려진 독일 쾰른 대성당은 1880년 완공된 건물이다. 1248년 착공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16세기 중반부터 280여 년 동안 공사가 중단됐다가 19세기 중반 재개돼 38년 만에 마무리됐다. 7월 18일까지 서울 강남구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에서 열리는 소장품전 ‘게르하르트 리히터: 4900가지 색채’를 방문할 계획이라면 이 건물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훑어보는 편이 좋다.

올해 89세인 리히터는 흔히 ‘살아 있는 작가 중 작품 가격이 가장 높은 작가’로 불린다. 그의 홈페이지를 살펴보면 예술에서 구상과 추상을 경계 짓거나 장르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행위인지 알 수 있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은 그가 1966년 페인트가게 색상 견본을 접한 계기로 착수한 색채 연구를 2007년 쾰른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복원 작업을 통해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높이가 최대 23m에 이르는 대성당 남쪽 벽면 스테인드글라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훼손된 후 일반 투명유리로 보수돼 있었다. 리히터는 한 변이 9.6cm인 정사각형 수공예 색유리 1만1500여 장을 무작위로 배열해 105m² 면적의 이 유리창을 채웠다. 당시 종교계 일각에서는 “신앙을 반영한 이미지를 담지 않아 성당에 부적합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리히터는 중세 스테인드글라스에 쓰인 72가지 색을 선별해 컴퓨터 난수생성기로 조합한 뒤 “너무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중립적인 명료함을 갖도록” 세밀하게 조정했다. 이 작업을 그동안의 색채 연구에 반영해 5행 5열로 이뤄진 컬러 패널 196종을 11개 버전으로 조합한 ‘4900가지 색채’를 완성했다. 서울 전시 작품은 9번째 버전이다.

스테인드글라스 작업 과정을 담은 29분 길이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전시실에서 꼭 관람하기 바란다. 벽면 안내문 QR코드를 스캔하면 스마트폰으로 오디오를 들을 수 있으므로 이어폰을 가져가는 것이 좋다. 모바일로 방문 예약을 해야 하며 관람료는 없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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