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살 박정자,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

김기윤 기자

입력 2021-03-23 03:00 수정 2021-03-23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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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롤드와 모드’ 일곱 번째 출연…마지막 ‘모드’로 무대 서는 배우 박정자
19세 청년과 80세 할머니 사랑 통해 상처받은 영혼의 치유 과정 그려
“80까지 이 공연” 18년전 소망 이뤄…“더는 욕심 없다 사뿐히 내려올 것”


2015년 박정자가 연기한 ‘해롤드와 모드’. 그는 “욕심도 없고 소유한 게 없는 모드는 나의 롤 모델이자 무공해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신시컴퍼니 제공·동아일보 DB



“여든 살까지 이 공연을 하고 싶다.”

박정자(79)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18년 전 그가 처음 무대에 오르며 호기롭게 던진 이 약속을 그는 현실로 만들었다.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이 된 배우 박정자가 5월 1일 개막하는 연극 ‘해롤드와 모드’에서 80세 노인 모드 역할로 관객과 만난다. 그가 ‘해롤드와 모드’에 출연하는 건 이번이 일곱 번째다.

22일 서울 중구의 한 문화공간에서 열린 연극 ‘해롤드와 모드’ 기자간담회에서 박정자는 “오래전부터 ‘80’을 핑계로 공연한다고 상상만 해왔는데 벌써 이 자리에 와버렸다”고 했다. 이어 “지금쯤 꽤 성숙한 배우가 되어 있을 줄 알았지만 여전히 저는 미성숙하다. 그래도 배우는 성자처럼 너무 지혜롭고 성숙하면 안 되는 것 같다”며 웃었다. 이날 간담회에는 박정자의 상대역인 해롤드를 연기하는 임준혁 오승훈을 비롯해 연출을 맡은 윤석화, 프로듀서인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가 참석했다.

2003년 이종혁. 신시컴퍼니 제공·동아일보 DB

2004년 김영민. 신시컴퍼니 제공·동아일보 DB


1987년 김혜자 김주승 주연으로 국내에서 처음 선보인 이 작품은 이후 박정자의 ‘시그니처 공연’으로 자리 잡았다. 2003년 그는 ‘19 그리고 80’(‘해롤드와 모드’의 당시 제목)에 출연하며 처음 인연을 맺었다. 뒤이어 2004, 2006, 2008(뮤지컬), 2012, 2015년까지 무대에 섰다. 2015년 공연부터 원제 ‘해롤드와 모드’로 제목이 변경됐다. 그가 한 역할로 자리를 지키는 동안 상대역으로 이종혁 김영민 윤태웅 강하늘 등 스타들이 거쳐갔다. 원작은 미국에서 1971년 소설과 동명의 영화로 출간 및 제작됐으며, 1973년 연극으로 탄생했다.

2006년 윤태웅. 신시컴퍼니 제공·동아일보 DB

2008년 이신성. 신시컴퍼니 제공·동아일보 DB


박정자가 “그 장면쯤 가면 슬쩍 긴장이 된다”고 털어놓을 만큼 작품 속 키스신은 초연 때부터 화제였다. 틀에 얽매이길 싫어하며 ‘자살 쇼’를 벌이는 19세 소년이 유쾌한 80세 할머니와 사랑에 빠지는 줄거리는 지금도 파격적이다. 이 유별난 사랑 이야기는 상처받은 영혼이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는다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박정자는 “해롤드를 매번 무척이나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으면 연기가 안 된다”며 “단순한 포옹과 키스가 아니라 모드와 해롤드의 마음이 가장 순수하게 만나는 찰나”라고 했다.

2012년 조의진. 신시컴퍼니 제공·동아일보 DB


윤석화는 “전문 연출가는 아니지만 박정자라는 거목과 묘목 같은 여러 후배들과 함께라면 아름다운 꽃밭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이어 “연극 외 이물질이 없는 작품으로 만들겠다. 소외당한 청춘과 극의 본질에 더 다가서려 노력하겠다”고 했다.

2015년 강하늘. 신시컴퍼니 제공·동아일보 DB


간담회 중 박정자는 이 작품의 ‘마지막’을 넌지시 언급했다. 그는 “주변에서 90까지 하라는 농담도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이 나이 먹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더 이상 욕심은 없다. 아주 사뿐하고 가볍게 내려오고 싶다”는 바람이다.

임준혁 오승훈은 “충실하게 해롤드를 연기하는 게 선배의 마지막에 누가 되지 않는 길”이라고 했다. 박명성 프로듀서는 “박정자 선생님이 건강을 잘 관리하신 덕분에 연극을 올릴 수 있다”며 “대배우들이 만들어 가는 작품은 큰 귀감이 될 것”이라고 했다.

모드는 극 중 이런 대사를 외친다. “어쩌면 이렇게 달라졌을까.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 60여 년간 무대만 바라보고 달려온 박정자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일지 모른다. 5월 1∼23일 서울 강남구 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 전석 6만5000원. 14세 이상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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