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용’ 꿈꾸다 지쳐버린 MZ세대, ‘노빠꾸’ 정신에 후련한 공감

서형석 기자 , 변종국 기자 , 황태호 기자

입력 2021-03-19 03:00 수정 2021-03-19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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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정주영 회장 타계 20주기


“이분이 ‘나 때는 말이야’ 하면 바로 수긍할 것 같다.”

‘현대 회장 정주영의 진짜 인생 생애-이봐 해보기나 했어?’라는 제목의 유튜브 동영상에 달린 댓글이다.

‘나 때는 말이야’는 MZ세대(밀레니얼세대+Z세대)가 기성세대의 꼰대 같은 모습을 비꼴 때 쓰는 표현이다. 기성세대가 뭐라고 해도 잔소리로 치부하며 귀를 닫을 것 같은 MZ세대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일대기에서만큼은 다른 반응을 보인다. 21일은 정 명예회장의 타계 20주기다.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태어난 MZ세대는 정 명예회장의 생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어려서부터 인터넷과 영상 콘텐츠에 익숙한 MZ세대는 그들의 방식대로 정 명예회장을 추모하며 그의 어록을 되새기고 있다.

○ MZ세대 공감하는 ‘개천용 공정’

MZ세대는 어려서부터 지구촌 어디서나 글로벌 브랜드 ‘현대(HYUNDAI)’를 접한 세대다. 경제적으로도 풍요롭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정 명예회장의 삶은 먼 나라 이야기에 가깝다. 하지만 무일푼에서 일군 성공 신화를 보면서 ‘개천에서도 용이 나온다’ ‘흙수저도 노력하면 된다’는 공정한 사회가 불가능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한다. 김화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금의 젊은 세대는 정 명예회장의 생전 시절보다 더 심한 양극화를 느끼고 있다”며 “불공정한 답답한 현실 속에서 MZ세대는 정 명예회장이 여러 시련들을 이겨낸 성공 신화에 눈길이 갈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테슬라를 창업한 일론 머스크처럼 외국에서나 있을 법했던 성공 스토리가 불과 수십 년 전 한국에서 쓰였다는 것에 MZ세대들은 긍정적 시각을 보내고 있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이 정 명예회장 20주기를 맞아 개최한 ‘이 땅에 태어나서’(정 명예회장 자서전) 독후감 대회에서는 응모작 6372건 중 1619건을 중·고등학생이 냈다. 대상을 수상한 민족사관고 3학년 홍성준 군(18)은 “정 명예회장에 대해 잘 몰랐는데 자서전이 한 편의 위인전 같았다. ‘적당히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해 온 내 태도를 반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금상 수상자인 울산 범서고 이현 군(17·2학년)도 “정 명예회장의 삶이 한 편의 소설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MZ세대는 정 명예회장을 의도적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이 제작한 콘텐츠 상당수는 정 명예회장이 겪은 정치권력과의 갈등, 통일국민당 창당과 대통령 선거 낙선, 2000년 경영권 분쟁 등 어두운 면까지 가감 없이 다룬다. 하지만 이런 동영상에도 “지금 살아있다면 일론 머스크, 스티브 잡스도 한 수 접어야” “누가 조선소와 배를 같이 만들어. 진짜 노빠꾸(물러서지 않는 집념을 뜻하는 인터넷 용어)” 같은 호의적 댓글이 많다. ‘왕회장’ ‘호랑이’ ‘카리스마’ 같은 무소불위 대기업 오너의 겉모습과 함께 ‘무수한 시련을 겪은 사람’이라는 인간적 모습을 조명한 것이다. 독후감 대회 금상 수상자인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이민주 씨(32·여)는 “예전에는 설립자로 크게만 보였던 정 명예회장이 생각이 깊고 열심히 살았던 ‘사람’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는 “MZ세대는 현대차 전기차 ‘아이오닉5’에 열광하고 서울 여의도 ‘더 현대 서울’에서 여가를 즐기는 세대다. 경부고속도로, 서울 올림픽처럼 오늘날 풍요와 위상을 있게 한 정 명예회장을 과거 세대와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것”이라고 말했다.

○ ‘3세대 현대’ 본격화… 정주영 가치가 밑바탕



정 명예회장이 떠난 현대는 이제 3세 경영의 막이 본격적으로 올랐다. 그의 손자들은 자동차, 중공업, 백화점 등을 이끌고 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등 2세들이 계열 분리된 소그룹들을 이어받아 각자의 자리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다면 이제는 또 한번 세대가 바뀐 것이다.

범현대가 장손인 정의선 회장이 이끄는 현대차그룹은 정 명예회장 타계 이듬해에 47조 원이었던 자산을 2020년 289조 원으로 불리며 세계 5대 완성차그룹으로 거듭났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조선업에서 압도적 세계 1위 자리를 지키며 정기선 부사장이 로봇과 수소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고 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유통 후발주자’ 꼬리표를 떼고 정지선 회장 주도로 면세점, 아울렛 등에서 연이어 성공하며 자산 16조 원(2020년)의 유통 ‘빅3’로 성장했다.

정의선 회장은 16일 임직원의 질문에 답하는 ‘타운홀미팅’에서 정 명예회장의 가치로 ‘신용’을 꼽으며 할아버지를 추모했다. 정 회장은 “사업에 성공해 계속 키워 나간 건 고객에 대한 신용, 채권자에 대한 신용이었다. 그게 유일한 답”이라며 “그 정신을 배우고 반드시 우리 것으로 만들어내서 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범현대가 그룹들로 구성된 ‘아산 정주영 20주기 추모위원회’는 ‘청년 정주영, 시대를 通(통)하다’라는 주제로 ‘청년’에 맞춰 추모행사를 진행한다. 정 명예회장의 창업정신을 MZ세대의 도전정신으로 잇겠다는 뜻이다. 현대를 상징하는 서울 종로구 현대차그룹 계동사옥에서는 온라인과 동시에 사진전을 개최한다. 계동사옥 별관에 있던 정 명예회장 흉상도 본관으로 옮겼다.

서형석 skytree08@donga.com·변종국·황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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