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공정’ 돋보이게 한 LH사태의 역설

이태훈기자

입력 2021-03-18 11:52 수정 2021-03-18 17:01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퇴임 전 마지막으로 대구지검을 방문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 대구=박영대기자 sannae@donga.com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땅 투기 의혹 사건이 문재인 정부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가운데 공교롭게도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사퇴한 직후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킨 LH 사태가 윤 전 총장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인 ‘공정과 법치’ 이미지를 더 부각시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윤 전 총장이 지금 국민에게 어필하는 정치적 자산이 ‘공정’인데, LH 사태가 문재인 정부의 불공정성을 드러내 대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윤 전 총장이 중도 사퇴한 명분은 여권이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을 목표로 추진한 중대범죄수사청 신설에 반대한다는 것이어서 LH 사태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 윤 전 총장이 사퇴한 4일만 하더라도 LH 사태는 여론이 주목하는 사안이긴 했지만 민심이 폭발하는 단계는 아니었다. 그런데 윤 전 총장이 언론 작심 인터뷰를 거쳐 직을 던진 4일 이후에는 국민적 분노가 달아오르면서 내년 대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초대형 이슈로 부상했다.

LH를 넘어 여당으로 땅 투기 의혹이 확산된 데다 투기 의혹이 불거진 해당 LH 직원들이 자숙하기는커녕 “꼬우면 이직하든가”라는 등의 망언으로 국민 감정에 불을 지르면서 파문이 일파만파로 확대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문재인 정부가 국정 철학으로 강조해온 ‘공정’에 대한 신뢰가 추락했고, 이는 역설적으로 문재인 정부에 위협적인 존재로 떠오른 윤 전 총장을 더 띄우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국민들이 기억하는 윤 전 총장의 공정은 ‘죄가 있으면 누구든 처벌한다’는 단순하고 간단명료한 원칙이다. 반면에 문재인 정부는 줄곧 ‘평등, 공정, 정의’를 역설했지만 LH 사태가 그것이 ‘말뿐인 공정’에 그쳐다는 걸 드러내면서 검찰권 행사를 통해 실제 공정을 실천한 윤 전 총장과 대비가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중도 사퇴 일주일 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윤 전 총장이 2위인 이재명 경기도지사와의 격차를 더 벌린 것이 이를 뒷받침하는 한 정황이다.

윤 전 총장은 올해 신년사에서도 “공정한 검찰”을 강조한 바 있지만 이미 그 전에 검사로서 걸어온 길 자체가 ‘공정’이라는 말에 부합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처럼 윤 전 총장은 권력형 비리가 드러나면 정권을 가리지 않고 엄정한 수사를 관철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국정농단과 적폐청산 수사를 벌여 박근혜, 이명박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고, 문재인 정부에서도 정권 실세들의 비리가 불거지자 이전 정부에서 했던 것과 같은 잣대로 강도 높게 수사에 나섰다. 검찰총장 임명 직후 벌인 2019년 ‘조국 수사’가 대표적인 예다.

정치권에서는 일련의 LH 사태 흐름을 두고 정치 감각이 있다는 평을 듣는 윤 전 총장이 차기 대선 주자로 사실상 스타트를 끊는 과정에서 일단 ‘초반 운’이 따라주고 있다는 말도 흘러나온다. 특히 ‘공정’ 이슈는 젊은층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여서 이전 선거에서 젊은층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던 여권에는 큰 악재가 되는 반면 보수 야권과 윤 전 총장에게는 대선에서 지지층을 넓히는 호재가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앞으로 대선까지 남은 기간이 1년이나 되는 만큼 그에게 적지 않은 고비가 찾아올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보수 야권의 대선 후보로 가시화되면 될수록 윤 전 총장을 주저앉히기 위한 여권의 전방위적인 네거티브 공세가 강화될 가능성이 큰 데다 평생 검사로 살아와 정치는 초보인 그가 시대를 앞서가는 비전과 정치력을 보여주지 못할 경우 ‘제2의 반기문’ 현상에 그칠 수도 있다.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