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30분씩 게임 하세요” 약 대신 게임 처방 받는 세상 [박성민의 더블케어]

박성민기자

입력 2021-03-13 15:00:00 수정 2021-06-11 18:5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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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서울 마포구의 스튜디오코인 사무실에서 본보 기자(오른쪽)가 교통사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환자를 위해 개발된 디지털 치료제를 체험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비 오는 도심의 사거리, 주행 신호를 기다리며 1차로에 멈춰 있는데 맞은편에서 트럭 한 대가 중앙선을 넘어 달려온다.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더니 잠시 후 산산조각 난 차량 앞 유리와 바람 빠진 에어백이 시야에 들어온다.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구급차 사이렌 소리에 안도감을 느낀다.

실제 상황은 아니다. 교통사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환자를 위한 ‘디지털 치료제’를 구현한 장면이다. 가상현실(VR) 콘텐츠 기업인 스튜디오코인이 교통사고 환자의 심리 치료를 위해 개발했다. VR기기를 착용하면 실제 운전석에 앉은 것처럼 느껴진다. 도로 종류와 혼잡도, 사고 시간과 날씨, 상대 차종 등 13가지 항목을 선택하면 환자가 겪은 사고와 유사한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

개발사 측은 “환자의 트라우마를 고려해 상황 재연 수준을 어떤 수준으로 할지 의료진과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튜디오 코인 제공



그러나 상용화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환자들에게 처방하려면 효과와 안전성이 입증돼야 한다. 현재 전남대병원과 임상 시험을 진행 중인데, 2023년 의료기기 승인을 받는 것이 목표다. 김새론 대표는 “보행자 사고 등 다양한 사고 상황을 개발하고 있다”며 “기존 상담 치료에 노출 치료를 병행하면 환자들의 심리적 불안감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 게임, VR로 치료를?

“한 달 동안 일주일에 다섯 번, 하루 25분씩 꾸준히 이 게임을 하셔야 합니다. 미션을 통과한 뒤에 경과를 살펴보죠.”

머지않아 병원에서 약 대신 이런 처방을 들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약 대신 애플리케이션(앱)을 내려 받아 건강을 관리한다. 게임 외에도 VR로 불러낸 가상 공간에서 공황 장애나 치매 환자들의 치료를 도울 수도 있다.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질병 및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앱, 게임, VR 등을 활용하는 ‘디지털 치료제(Digital therapeutics)’ 시장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리서치앤드마켓에 따르면 디지털 치료제 시장 규모는 올해 27억 달러(약 3조686억 원)에서 2025년 69억 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디지털 치료제는 합성화학물, 바이오의약품에 이어 ‘3세대 치료제’로도 불린다. 빅데이터와 AI를 활용해 만성 질환을 관리하고 우울증, 수면장애, 약물 중독 등의 치료를 돕는다. 기존 약물 치료의 한계를 보완하고 병원 방문이 힘든 고령 환자들의 예후 관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2017년 세계 최초로 승인 받은 약물중독 치료 앱 ‘리셋(reSET)’. 미국 디지털 치료제 시장 규모를 보면 행동 교정 분야가 전체의 31%를 차지해 비중이 가장 높다. 페어 테라퓨틱스 홈페이지 캡쳐



● “의료비 부담 낮추고, 치료 효과 높여”

미국에선 2017년 약물중독 치료용 앱 ‘리셋(reSET)’이 세계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다. 지난해엔 소아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치료를 돕는 컴퓨터 게임 ‘엔데버Rx’가 나왔다. 악당을 잡고 장애물을 피하는 게임을 하며 뇌의 특정 신경회로를 자극하는 원리다. 임상실험 결과 엔데버Rx를 사용한 아동의 3분의 1가량은 증상이 뚜렷이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소아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환자가 엔데버Rx를 사용하는 모습. 엔데버Rx는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은 첫 게임 기반 디지털 치료제다. 아킬리 인터렉티브 홈페이지 캡쳐


디지털 치료제의 장점은 병원 밖에서 생성되는 환자 데이터를 이용해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정세영 분당서울대병원 디지털헬스케어연구사업부 교수는 “만성 질환자가 병원에 덜 방문하면서도 건강을 꾸준히 관리할 수 있다”며 “병원 중심의 고비용 의료 체계를 개선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효능을 미심쩍어하는 시선도 있지만 사용자가 점차 늘면서 유효성을 검증한 연구 결과도 속속 발표되고 있다. 리셋을 개발한 페어 테라퓨틱스가 2018년 선보인 리셋-오(reSET-O)는 마약성 진통제(오피오이드) 중독 치료를 돕는 앱이다. 지난해 11월 환자 351명의 앱 사용 전후 6개월씩의 병원 이용 형태를 조사한 결과 외래 진료와 응급실 방문 횟수가 줄었고, 환자 한 명당 2150달러의 의료비를 절감하는 효과를 낸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지난해 8월 이헌정 고려대 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팀이 발표한 연구에서도 우울증 환자가 스마트폰 기반의 디지털 치료를 썼을 때 증상이 완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디지털 치료제 사용군의 연평균 재발 횟수는 0.6회, 증상 재발 기간은 22일이었던 반면 사용하지 않은 집단에서는 각각 2회, 84일로 편차가 컸다.




● 인허가 규제 정비 서둘러야
한국은 언제쯤 디지털 치료제를 처방받을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이르면 내년쯤 첫 디지털 치료제가 승인될 것으로 전망했다. 2019년 헬스케어 스타트업 뉴냅스가 국내 첫 임상 시험 승인을 받았다. VR을 활용해 뇌손상 후 발생한 시야 장애를 치료하는 디지털 치료제 ‘뉴냅 비전’이다. 의료와 정보기술(IT)에 강점이 있는 만큼 제대로 ‘판’만 깔아지면 선두 주자들을 따라 잡을 수 있다는 게 산업계와 의료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미국 시장에 도전하는 기업도 있다. 빅씽크테라퓨틱스는 강박장애(OCD) 환자의 인지행동 치료를 돕는 디지털 치료제 ‘오씨프리’를 개발해 이르면 다음 달 미국에서 임상 시험에 들어간다. 김성태 DTx팀 부장은 “불안감을 느끼는 상황에 노출됐을 때 강박 행동을 멈추도록 알람을 줘서 환자가 자신의 행동을 인지하도록 하는 원리”라고 설명했다.

디지털 치료제 개발이 활성화되려면 인허가 등 규제를 정비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헌정 고려대 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디지털 치료제는 인체에 직접 투약하는 기존 약물보다 안전하다”며 “기존 약물을 검증하는 잣대를 디지털 치료제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미국은 디지털 치료제의 버전이 바뀔 때 임상 시험을 생략하는 등 허가 절차를 간소화하고 있다.


1월 열린 국제가전전시회(CES)에서 최우수 혁신상을 수상한 간질 관리 앱 ‘엡시(EPSY)’. 환자의 식습관, 수면 패턴, 약물 복용에 따른 증상 발현 데이터를 분석해 적절한 치료를 받도록 돕는다. 엡시 홈페이지 캡쳐



● 기존 약물 ‘대체재’ 아닌 ‘보완재’

디지털 치료제로 승인되더라도 상용화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의사들이 기존 약물 대신 디지털 치료제를 처방하려면 효과와 안전성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환자가 집에서 혼자 써야 하는 형태의 디지털 치료제는 환자가 사용을 거부하면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보험 적용 여부와 의료수가(酬價)를 어떻게 책정할지도 논의해야 한다. 수가가 비싸고 보험이 안 되면 이용률이 낮을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2019년 1~10월 리셋-오 앱을 사용한 환자는 1265명에 그쳤다. 미국의 오피오이드 중독 추정자(약 200만 명) 규모를 고려하면 업체의 기대에 못 미친 결과다.

안전성과 효능에 대해서도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개발 기간이 짧고, 기존 신약과 임상시험 설계가 달라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후보 물질 발굴부터 승인까지 평균 개발 기간이 15년가량 걸리는 일반 신약과 달리 디지털 치료제의 개발은 3.5~5년가량(편웅범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교수, 디지털헬스의 주도적 지위에 관한 예측)이다. 기존 신약은 1만 명가량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하지만 디지털 치료제는 500명 이내다.

스마트 기기에 의존하는 건강관리가 환자에게 질환의 발병, 증상 개선의 책임을 떠넘기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가령 소아 비만은 잘못된 식습관을 가진 부모, 학교 앞에 무분별하게 들어선 패스트푸드 가게가 더 큰 원인일 수 있다. 하지만 식단이나 운동 관리를 돕는 디지털 치료제 앱을 손에 쥐어주고 “왜 살을 못 빼느냐”고 나무라는 건 질환의 ‘원인의 원인’을 간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디지털 치료제는 건강관리 및 치료를 위한 좋은 ‘도구’이지만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의료계도 디지털 치료제의 순기능을 기대하면서도 과도한 낙관론을 경계하는 이유다. 김헌성 서울성모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디지털 치료제가 기존의 치료법을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렵다”며 “아직까지는 보완재 정도로 인식하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성민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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