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로 교통사고 트라우마 극복… 게임으로 ADHD 치료… ‘디지털 치료제’ 의료계 명약 될까

박성민 기자

입력 2021-03-13 03:00 수정 2021-03-13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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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선 이르면 내년께 출시될 듯
빅데이터-AI 활용 심리치료 도움… 美 FDA, 약물중독 앱 세계 첫 승인
병원방문 줄어 의료비 부담 덜지만, 보험적용 등 과제 상용화는 먼 길
“기존 약물 대체 아닌 보완재 역할”


8일 서울 마포구의 스튜디오코인 사무실에서 본보 박성민 기자(오른쪽)가 교통사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환자를 위해 개발된 디지털 치료제를 체험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비 오는 도심의 사거리, 주행 신호를 기다리며 1차로에 멈춰 있는데 맞은편에서 트럭 한 대가 중앙선을 넘어 달려온다.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더니 잠시 후 산산조각 난 차량 앞 유리와 바람 빠진 에어백이 시야에 들어온다.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구급차 사이렌 소리에 안도감을 느낀다. 실제 상황은 아니다. 교통사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환자를 위한 ‘디지털 치료제’를 구현한 장면이다. 가상현실(VR) 콘텐츠 기업인 스튜디오코인이 교통사고 환자의 심리 치료를 위해 개발했다. VR 기기를 착용하면 실제 운전석에 앉은 것처럼 느껴진다. 도로 종류와 혼잡도, 사고 시간과 날씨, 상대 차종 등 13가지 항목을 선택하면 환자가 겪은 사고와 유사한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상용화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환자들에게 처방하려면 효과와 안전성이 입증돼야 한다. 현재 전남대병원과 임상시험을 진행 중인데, 2023년 의료기기 승인을 받는 것이 목표다. 김새론 대표는 “보행자 사고 등 다양한 사고 상황을 개발하고 있다”며 “기존 상담 치료에 노출 치료를 병행하면 환자들의 심리적 불안감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 “의료비 부담 낮추고, 치료 효과 높여”

빅데이터 및 인공지능을 활용해 만성 질환을 관리하거나 정신건강 회복을 돕는 디지털 치료제 시장이 주목받고 있다. 기존 약물 치료의 한계를 보완하고 병원 방문이 힘든 고령환자들의 예후 관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적지 않다.

디지털 치료제는 질병 및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 게임, VR 등을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합성화학물, 바이오의약품에 이어 ‘3세대 치료제’로도 불린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리서치앤드마켓에 따르면 디지털 치료제 시장 규모는 올해 27억 달러(약 3조686억 원)에서 2025년 69억 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에는 아직 선보인 치료제가 없지만 미국에선 2017년 약물중독 치료용 앱 리셋(reSET)이 세계 최초로 미국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지난해엔 소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치료를 돕는 컴퓨터 게임 ‘엔데버Rx’가 나왔다. 악당을 잡고 장애물을 피하는 게임을 하며 뇌의 특정 신경 회로를 자극하는 원리다. 임상시험 결과 엔데버Rx를 사용한 아동의 3분의 1가량은 증상이 뚜렷이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디지털 치료제의 장점은 병원 밖에서 생성되는 환자 데이터를 이용해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정세영 분당서울대병원 디지털헬스케어연구사업부 교수는 “만성 질환자가 병원에 덜 방문하면서도 건강을 꾸준히 관리할 수 있다”며 “병원 중심의 고비용 의료체계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전문가 “직접 투입 기존 약물보다 안전”

한국은 빨라야 내년쯤 첫 디지털 치료제를 선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2019년 헬스케어 스타트업 뉴냅스가 국내 첫 임상시험 승인을 받았다. VR를 활용해 뇌손상 후 발생한 시야 장애를 치료하는 디지털 치료제 ‘뉴냅 비전’이다. 미국 시장에 도전하는 기업도 있다. 빅씽크테라퓨틱스는 강박장애(OCD) 환자의 인지행동 치료를 돕는 디지털 치료제 ‘오씨프리’를 개발해 이르면 다음 달 미국에서 임상시험에 들어간다.

디지털 치료제 개발이 활성화되려면 인허가 등 규제를 정비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헌정 고려대 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디지털 치료제는 인체에 직접 투약하는 기존 약물보다 안전하다”며 “기존 약물을 검증하는 잣대를 디지털 치료제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미국은 디지털 치료제의 버전이 바뀔 때 임상시험을 생략하는 등 허가 절차를 간소화하는 추세다.

디지털 치료제로 승인되더라도 상용화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보험 적용 여부와 의료수가를 어떻게 책정할지도 논의해야 한다. 과도한 낙관론도 우려스럽다. 김헌성 서울성모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디지털 치료제가 기존의 치료법을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렵다”며 “아직까지는 보완재 정도로 인식하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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