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병의 혼 서린 홍주성… 김좌진-한용운의 목소리 들리는 듯

홍성=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입력 2021-03-06 03:00 수정 2021-03-06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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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충남 홍성

홍남 홍성군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에 걸린 대형 태극기. ‘대한독립만세’라는 글귀와 함께 ‘그날의 함성과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이 적혀 있다. 홍성군청 제공.


《올해 102돌인 삼일절, 충남 홍성의 상징인 홍주성(홍주읍성, 사적 제231호)에 대형 태극기가 내걸렸다. 홍주성 동문인 조양문(朝陽門) 정면을 절반이나 가릴 정도로 큰 태극기에는 ‘대한독립만세’라는 글귀와 함께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만해 한용운 선사, 백야 김좌진 장군 그리고 수많은 민중 투사들의 희생을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다짐도 적혀 있었다. 100여 년 전 홍성(옛이름 홍주)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활동 무대가 다른 두 걸출한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지금도 찾고 있을까. 한 개 군에서 무려 20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해 항일운동의 성지로 자부하는 홍성으로 길을 나섰다. 》


충남 홍성군 홍성읍 중심부에 위치한 홍주성의 남문 홍화문(洪化門). 돌을 다듬어 야무지게 쌓아올린 4m 높이 성벽을 좌우로 두고 있는 이 문은 조선 초기의 성 쌓기 특징을 잘 보여준다. 원래의 성은 출입문 4개에 성곽 둘레가 1772m에 달했으나, 지금은 홍화문을 기준으로 약 800m 정도의 성곽만 남아 있다.

2013년에 복원된 홍화문 문루에 오르면 시원하게 조성된 소나무숲과 잔디밭, 홍주목사가 업무를 보던 동헌인 안회당, 서쪽으로 연못 위의 6각 모양 정자 여하정 등 아름다운 성내 풍경이 펼쳐진다. 홍성군이 선정한 홍성 12(景) 중 첫 번째 볼거리다. 그런데 역사의 눈으로 보면 홍주성에서는 또 다른 세계가 전개된다.

115년 전인 1906년 5월19일, 홍화문을 경계로 성 안쪽과 바깥쪽은 살벌한 대치 현장이었다. 남문 성벽에 의지해 성을 사수하려는 일본군과 ‘조선의 성’을 결단코 되찾으려는 의병부대간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의병부대는 민종식(1861-1917)이 이끄는 ‘홍주의병’.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1905년)에 분노한 애국지사들이 주도한 무력 결사체다. 이들은 홍성 남쪽의 홍산(부여군 내산면 금지리)에서 결집한 후 서천, 비인, 남포, 결성 등지를 점령하면서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양총(洋銃)과 구식 화포 2문 등으로 무장한 1000여 명의 의병부대는 홍주의 삼신당리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을 일거에 격파한 후 홍주성으로 물밀 듯이 쳐들어갔다.
홍주성전투에서 가장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 홍화문. 2013년에 복원됐다. 홍성군청 제공.

그러나 정작 최종 목표지인 홍주성에서는 난관에 부딪쳤다.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튼튼했다. 일본 헌병과 경찰은 서해로 통하는 ‘충청의 관문’을 지키기 위해 성문을 굳게 닫은 채 거세게 저항했다. 마침내 홍주의병의 날랜 군사 2명이 성안으로 통하는 하수구를 발견해낸다. 이들은 몰래 성안으로 들어가 동서남북의 4대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5월20일 홍주의병은 성을 점령했다. 의병들이 일본군을 잡으려 했으나 함락 직전 이미 달아나버렸다.

이후 홍주성은 공수(攻守)가 뒤바뀐 상태에서 열흘 남짓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투지가 된다. 당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우리측 관군까지 동원해가며 성 탈환에 나섰으나 번번이 패하게 되자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그는 기마병과 보병 등 중무장한 최정예 일본군을 대규모로 파병했다. 결국 우세한 화력과 전투 경험이 풍부한 일본군에 밀려 홍주의병은 패했다. 그해 5월30일의 일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측은 10여 명이 사망한 반면 의병 측은 수백 명의 전사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에서는 이 홍주성 전투를 ‘2차 홍주의병’이라고 부른다. ‘1차 홍주의병’(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한 항일의병)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의병전쟁 사상 단일 전투로는 최다 희생자를 낸 2차 홍주의병은 전국적인 의병 항쟁을 촉발시키는 도화선이 됐다는 게 역사학계의 평가다.


●한날한시에 제사 지내는 홍성 사람들
홍주성 홍화문에서 홍성천 개울을 따라 동북 방향으로 1km 남짓한 거리의 ‘홍주의사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홍주의병을 널리 알리는데 애써온 이종화 충남도의회 의원이 동행했다. 이 의원은 기자에게 홍성 독립운동 성지 순례를 제시하면서 취재를 요청해왔을 정도로 ‘홍성 사랑’이 대단했다.

그는 “홍주성 전투에서 사망한 의병들의 유해가 홍성천변과 남산 일대에 방치돼 있었는데, 광복 이후인 1949년 현재의 홍주의사총에 수습한 유골들을 봉안했다”고 말했다. 매년 5월 30일에는 의병들을 위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홍주의병의 숭고한 뜻으로 볼 때 이곳은 의사총이 아니라 ‘의사릉’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홍주의병의 유골들을 수습해놓은 홍주의사총. 이종화 충남도의회 의원이 의사총 조성의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안영배 기자

이 의원은 “홍성에는 같은 날 조상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았다”고 말했다. 홍주성 전투에서 홍성 출신 의병과 민간인들이 한날한시에 사망했기 때문이란다.

두 차례에 걸쳐 의병을 일으키면서 숱한 희생자를 낸 홍성 사람들이지만, 1919년 3·1만세운동 때도 분연히 나섰다. 홍성군 내 각 지역에서 횃불시위 등을 끊임없이 벌이며 일본 군경을 괴롭혔다.

홍성 만세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왕세자(순종)의 스승이던 유학자 김복한(1860~1924)이다. 그는 만세운동 당시 호서유림을 대표해 전세계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 운동을 펼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김복한은 1894년 일제침략이 노골화되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후, 고향 홍성에서 1차 홍주의병을 주도했고 2차 홍주의병에서도 배후인물로 지목돼 일경에게 곤장으로 두들겨 맞으며 체포되기도 했다.

왕대나무에 왕대난다고 했던가. 김복한의 유교 의리 정신과 항일투쟁 정신을 배운 게 바로 김좌진(1889~1930)이다. 청산리 전투의 명장 김좌진은 김복한과는 안동김씨 수북공파 문중의 종질과 당숙이라는 혈연도 맺고 있었다. 2차 홍주의병 당시 김좌진의 나이는 17세. 당시로는 이미 청년인 김좌진은 홍주성 전투를 직간접으로 경험했고, 그것이 그를 항일 무장투쟁의 길로 이끌었을 것으로 보인다.


● 김좌진과 한용운을 배출한 명당
김좌진의 생가가 있는 갈산면으로 갔다. 김좌진의 호를 따라 ‘백야공원’으로 명명된 이곳에는 생가를 복원한 터와 사당,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생가 대문 입구에 새겨진 ‘가노를 해방시킨 것은 민족의 봄이요(家奴解放民族春), 청산리 대첩은 광복의 몸통이다(靑山大捷光復身)’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홍성군 갈산면의 김좌진 생가. 안영배 기자.

88칸 규모를 자랑하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김좌진은 청년이 된 어느날(15~17세), 바로 이곳 터에서 노비 30여 명을 불러모아 잔치를 벌인 뒤 노비문서를 그 자리에서 불태우고 소유하던 전답까지 골고루 나눠주었다. 그리고는 곧장 홍성지역의 젊고 유능한 학생들을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호명학교(현 갈산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김좌진의 생가를 살펴보니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 교과서 같은 곳이다. 집 뒤로는 형산을 두고 앞으로는 와룡천을 둔 배산임수(背山臨水)형 터다. 땅 자체가 부자를 만들어내는 재물형 명당인데, 거기서 문인이자 무인인 인물이 태어났다는 게 이채롭다.

갈산면은 장군의 고향답게 길가 이곳저곳에 3·1운동을 기념하는 태극기가 진작부터 펄럭거리고 있었다. 갈산면사무소 앞의 장원식당에서 갈산면 주민들을 만나 김좌진의 친인척을 수소문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안동김씨가 번성했던 갈산 지역에서 어느 순간부터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됐다는 거다. 김좌진과 그의 가솔은 어디로 갔을까.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지역으로 대거 이동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린내가 나지 않고, 칼칼하면서도 달짝지근한 이 지역의 특산 ‘갈치찌게’를 먹는 것으로 아쉬움을 대신했다.
홍성군 결성면의 한용운 생가. 안영배 기자.

김좌진생가지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결성면에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한용운(1879~1944)의 생가지가 있다. 행정구역상 면이 다를 뿐이지, 같은 지역에서 역사에 길이 빛날 두 명의 독립운동가가 나온 것이다.

한용운 생가 터 또한 명당이다. 사방의 산들이 생가의 지기(地氣)를 보호해주는 전형적인 부잣집 명당이다. 고위 관직을 지낸 부친(한응준) 밑에서 자란 한용운은 김복한, 이설 등이 일으킨 1차 홍주의병 소식을 듣고 커다란 충격을 받은 후 조국과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뜻을 세웠다. 한용운 역시 홍주의병에 자극받아 독립운동의 길로 나선 셈이다.


●‘독도는 우리 땅’ 안용복을 살려낸 남구만
홍성 12경중 7경(한용운생가지)과 8경(김좌진생가지)에서 터의 좋은 기운과 함께 그들의 애국정신에 감화되는 체험을 한 후, 마지막 여정으로 구항면 내현리 ‘거북이마을’에 있는 약천 남구만(1629~1711)의 생가지를 택했다.

조선 최고 관직인 영의정까지 지낸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시조를 지은 이로 유명하지만, 그가 우리 국토를 지키기 위해 한평생을 바친 진정한 수토사(搜討使)라는 사실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그는 조선의 무능한 관리들이 울릉도를 일본에 넘겨주려 했던 것을 막아냈고, 함길도(함경도) 관찰사 시절에는 세종이 설치했던 북서4군을 다시 설치하도록 주장하는 등 잊혀져 가던 북방지역을 환기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일본에 가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안용복을 살려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정부(숙종)가 국격을 깎은 행동이라는 죄명으로 안용복을 사형시키려 했을 때, 남구만은 “안용복을 죽이는 것은 대마도주만 기쁘게 할 뿐”이라며 적극적으로 항변해 살려냈다.
약천 남구만의 생가가 자리한 구항면 거북이마을. 남구만의 약천초당(생가) 바로 인근에 마을을 상징하는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있다. 안영배 기자.

그는 만년에 고향인 홍성으로 낙향했다. 고위직을 지냈지만 아주 청렴하게 살았던 모양이다. 그가 시조에 남긴 것처럼 ‘소 치는 아이와 재넘어 밭 갈 일’을 걱정할 정도로 말이다. 그의 생가는 번듯하게 지은 현대식 집들 한쪽에 초라하게 복원돼 있다.

조국의 산하를 지키는 데 앞장서온 그는 홍성의 주권수호와 자주독립 정신의 원조로 기록될 만한 인물이다. 뒤늦게나마 갈산면 취생리 폐교 부지에 남구만에서 근대의 독립운동가에 이르기까지 조국의 땅과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애써온 이들을 기리는 내포역사박물관(가칭)이 생긴다고 하니 다행스럽다.
홍성 제6경(景)인 서해 낙조 풍경. 서부면 속동마을에서 서해 천수만의 해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안영배 기자.

홍성의 명물인 토굴새우젓을 만들어내는 광천토굴. 토굴은 1년 내내 온도 13~15℃, 습도 85% 이상을 유지한다. 안영배 기자.

홍성의 독립운동 성지 순례 코스는 하루 일정으로 다녀가기엔 벅차다. 홍성 제6경인 속동마을에서 낙조를 즐기고, 홍성 명물인 광천토굴 새우젓 구경까지 할 수 있는 1박2일 코스를 추천한다.


글·사진 홍성=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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