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이 애써 참성단에 오른 까닭은…

강화도=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입력 2021-02-20 03:00 수정 2021-02-20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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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강화도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있는 참성단. 수령 150여 년의 소사나무(국가지정문화재 제502호) 뒤로 네모반듯한 제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동짓날이 되면 이 계단 중앙으로 해가 떠올라 제단 한가운데를 통과하는데, 동지일출선에 맞춰 제단이 설계됐음을 뜻한다.

《강화도 남쪽에 위치한 마니산은 고려와 조선의 사대부들이 신성한 터를 찾아가 참배하는 국토 순례인 ‘수토(搜討)’ 여행 대상지 중 한 곳이다. 봄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는 입춘 절기, 선인들의 전통을 따라 강화도로 수토 여행을 떠나보자. 한반도의 배꼽자리이자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3강을 낀 해구(海口)인 강화도에서는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려는 수토의 진정한 뜻과 함께 당대 최대 강국 몽골에 치열하게 저항한 고려의 기개를 느껴볼 수 있다.》


강화도를 상징하는 마니산(472m)은 북녘 백두산 천지에서 직선거리로 500km 남짓, 남녘 한라산 백록담에서도 똑같이 500km 남짓한 거리에 있는 한반도 중앙부의 산이다. 백두산과 한라산처럼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사적 제136호)에서도 물이 솟아났다. 지금은 우물터만 남아 있지만, 광복 이전인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참성단에 올라 쪽박으로 물을 떠 마시곤 했다는 게 마을 노인들의 얘기다. 암반으로 이루어진 정상에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물이 있던 마니산은 이미 ‘영산(靈山)’ 반열에 오른 신성한 곳임을 암시한다.

신령한 산답게 오르는 길도 만만찮다. 마니산 입구에서 1000여 개에 달하는 돌계단 길을 1시간 넘도록 숨을 헐떡거리며 밟아가다 보면 어느덧 정상에 우뚝 선 참성단을 만나게 된다. 참성단은 높이 6m인 돌로 이루어진 제단이다. 아래 제단은 둥근 원형으로 하늘을 상징하고, 위쪽 제단은 네모반듯한 방형으로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오늘날 참성단은 전국체육대회를 밝히는 성화의 점화지로 유명하지만, 과거에는 국가적 차원의 제천(祭天) 의식 장소이자 하늘의 해와 별을 관측하는 천문관측소였다. 조선 정조 시기의 기상관측서 ‘서운관지(書雲觀志)’에는 천문 관측을 위해 대대로 참성단에 관상감 관원을 파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성단이 천문관측소 역할을 했다는 현장 증거도 있다. 방형의 제단 위치가 그렇다. 동행한 천문지리학자 임정규 교장(충남 문산초교)은 “동짓날이 되면 해가 방형 제단 중심부로 이어지는 돌계단 중앙으로 떠올라 제단 한가운데를 정확히 통과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즉 일력(日曆)을 계산하기 위해 동지일출선(冬至日出線·동지 때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표시하는 선)을 따라 방형 제단이 설계됐다는 것이다.

● 고려 왕, 참성단에 오르다

참성단은 ‘전국에서 가장 기(氣)가 센 곳’으로도 소문난 곳이다. 사실 이곳은 공중에서 맑은 기 에너지가 집중적으로 쏟아져 내리는 ‘천기(天氣)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참성단은 훼손 및 안전상의 위험으로 접근이 금지된 상태다. 그러나 제단 근처에서도 하늘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공중으로 치솟듯 뻗어 있는 주변의 기암괴석들도 마치 이 일대가 하늘로 통하는 관문임을 상징하는 듯하다.

옛 사람들도 비슷한 감흥을 느꼈던 모양이다. 고려와 조선 두 왕조를 섬긴 성리학자 권근(1352∼1409)은 마니산과 참성단을 가리켜 “바다 위의 높은 산은 저 멀리 떨어진 인간세상의 번잡과 소란을 막아주고, 제단 한복판은 하늘과 가까워 신령의 하강을 맞이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권근은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문(祭文)을 짓기도 했다. ‘마리(니)산은 단군께서 제를 올리던 곳이옵고, 성조(聖祖·고려 태조 왕건)께서 백성을 위해 나라를 세운 이래로 옛것을 이어받아 결실을 맺은 곳이오며, 후대 왕이 도적들을 피해 도읍을 옮겨 나라를 보존한 곳입니다….’(권근의 ‘양촌집’ 제29권)

제문은 강화도 마니산과 고려의 인연이 건국 초부터 이어져 왔음을 알려준다. 또 고려 무신정권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것이 단지 바다 가운데 섬이라는 지정학적 이유만으로 선택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선대의 숨결이 서린 강화도와 마니산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 의지처로서의 의미도 컸다. 복기대 교수(인하대 고조선연구소장)는 “고려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가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이후 원종 임금도 참성단에 올라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말했다.

참성단에서는 서해바다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한편으로 맑은 날이면 고려 수도 개성의 주산인 송악산도 보인다. 원종 역시 참성단에서 송악산을 바라보면서 환도(還都)의 그날을 애타게 기다렸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참성단으로 오르는 길은 중·노년층에게는 다소 힘이 벅찬 등반 코스다. 참성단에 가고 싶어도 험난한 돌계단 때문에 산행을 포기하는 이들이 적잖다. 유럽의 산악 모노레일처럼 환경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참성단을 쉽게 오를 수 있는 교통 시설이 아쉽다. 역사관광 자원은 사람이 많이 찾을수록 값어치가 빛나고 더욱더 보존을 잘할 수 있다는 관광전문가들의 말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고려천도공원(강화군 송해면 당산리)에 조성된 ‘국난극복-팔만대장경’ 상징 조형물. 높이 7m 규모의 이 조형물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릉비를 형상화해 고려의 국난극복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 고려 개성의 축소판 강화읍

고려궁지에 있는 외규장각. 1782년 조선 정조 임금이 옛 고려궁궐 터에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인 외규장각을 세웠으나 1866년 병인양요 때 외규장각의 도서들을 약탈당하고 건물도 소실됐다. 현재의 건물은 2003년에 복원한 것이다. 외규장각 뒤로 고려가 송악산으로 명명한 북산(北山) 줄기가 보인다.
참성단에서의 수토 순례를 마치고 북상해 강화읍 시내의 ‘고려궁지’로 향했다. 1232년 고려 지배층은 천년의 요새인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강도(江都)’라고 이름 지었다. 개성을 송도(松都)라고 했듯이 ‘도(都)’는 임금이 사는 도읍지를 의미한다. 이후 38년간 강도(강화도)는 고려의 도읍지이자 가열한 대몽항쟁의 기지가 됐다.

강도는 개성을 그대로 본뜬 계획도시로 성장했다. ‘고려사’는 이때를 이렇게 기록한다. “구정(毬庭·격구 놀이를 할 수 있는 넓은 마당), 궁궐, 사지(寺址)의 이름은 모두 송도를 모방하고 팔관, 연등, 행향도량(行香道場)은 한결같이 옛 법식을 따랐다.”

이에 따라 궁궐의 뒷산(현재 북산)은 개경의 주산 송악산과 똑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매년 4월 강화도 ‘진달래축제’로 유명한 고려산은 아예 국명(國名)이 산 이름으로 사용된 경우다. 개성에 있던 흥왕사, 선원사, 왕륜사 등 주요 사찰들도 그 이름 그대로 강화도 곳곳에 들어섰다. 그렇게 2년여에 걸친 건축 작업 끝에 도성의 틀이 갖춰졌고, 마침내 개성을 빼닮은 ‘쌍둥이 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고려궁지에서 내려다본 강화읍. 당시 고려 궁궐의 규모는 강화읍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동락천(현재 강화대로로 복개된 상태)까지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쉽게도 당시 고려 궁궐의 모습을 찾아볼 순 없다. 고려 정권이 몽골과의 화친 조건으로 강화 궁궐을 허물어뜨렸기 때문이다. 궁궐의 주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 현재의 고려궁지(강화읍 관청리 163, 사적133호)다. 실제로는 궁궐 규모가 이보다 훨씬 컸을 것이라고 한다. 고려 집권층에서 유행한 풍수지리를 고려해보면 송악산(북산) 자락에서부터 그 앞으로 물이 흐르던 동락천 일대까지 궁궐과 관련 있는 건물들이 들어섰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강화읍 시내를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던 동락천마저 복개돼 도로(강화대로)로 사용되고 있어서 애초 모습을 복원해내긴 힘들 것 같다.

현재 ‘고려궁지’에 지어진 건물들 역시 조선시대의 유적이다. 조선의 역대 왕들이 이곳에 행궁, 강화유수부, 외규장각(2003년 복원) 등을 세웠기 때문이다. 터가 편안치 못했던지 이곳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점령돼 약탈당하거나 소실되는 수난을 겪었다.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됐다가 영구임대 형식으로 귀환한 ‘강화 외규장각 의궤’도 이곳에서 벌어졌던 역사의 아픔이다.

교동도 화개산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풍경. 고구저수지(가운데) 너머 바다 멀리에 북한 배천군이 희미하게 보인다.
강화읍 고려궁지에서 더욱 북쪽으로 올라가면 또 다른 고려의 자취가 남아 있다. 철조망 건너 북녘 땅이 지척에 보이는 승천포(강화군 송해면 당산리)라는 곳이다. 그간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는 바람에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승천포는 고려시대 개경과 강화를 잇는 뱃길이 닿는 포구였다. 도읍 이전을 결정한 고려 고종의 어가 행렬이 강화도에 첫발을 디딘 곳이기도 하다.

강화군은 2019년 이 같은 역사성을 고려해 이곳에 고려천도공원을 조성했다. 이 공원의 출입부는 고려 궁궐 만월대의 정문을 형상화한 천도문, 고종 어가행렬도를 표시한 원형 앉음벽 광장, 국난 극복의 역사를 담은 7m 규모의 팔만대장경 상징 조형물, 전망대 등이 갖춰져 있다.

특히 전망대에서는 바로 앞 물길 건너 2km 떨어진 거리에 북한 개성 땅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고려 궁궐 만월대까지가 불과 20여 km 거리다. 남한에서 가장 가깝게 북한 땅을 볼 수 있는 지역이다. 강화군은 강화도의 이 같은 지형 특성을 고려해 개성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교동도 화개산 정상에 스카이워크형 전망대를 설치하는 등으로 안보관광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다만 승천포나 교동도 모두 안보 민감 지역인 만큼 해병대의 출입증을 받아야만 차량 통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사진·글 강화도=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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