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피카츄를 만들고 싶던 연출가 선과 악을 끌어내다

김기윤 기자

입력 2021-02-15 03:00:00 수정 2021-02-15 03:09:08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뮤지컬 ‘검은 사제들’ 오루피나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최근 만난 오루피나 연출가는 “공포영화를 못 볼 정도로 겁이 많지만 신부들이 구마하는 모습은 뮤지컬 무대 위에서 매력적일 것”이라고 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연출가 오루피나(38)의 작품에선 무대 암전이 거의 없다. 주역 배우들도 좀처럼 무대 밖으로 퇴장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쉬어가는 타이밍이 거의 없다는 의미다.

혹여 잠시라도 배우가 보이지 않는다면? 무대를 조용히 빠져나온 배우는 아마도 다음 장면에서 무대 정반대편이나 세트 위로 별안간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물리적으로 이게 가능할까 싶은데, 결국 잠시 사라진 배우들이 백스테이지에서 전력 질주한 뒤 숨이 잦아들기도 전 다음 넘버를 소화하는 방법뿐이다. 출연진에게는 더없이 가혹해도, 관객 눈에는 가장 친절한 오 연출가의 지론 때문이다.

지난해 제4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대상, 연출상을 비롯해 7관왕을 거머쥔 ‘호프’의 오 연출가가 가혹하면서도 친절한 신작 ‘검은 사제들’로 돌아왔다. 최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오 연출가는 “팬데믹으로 모두가 우울증에 걸린 듯 힘든 시기, 눈에 보이지 않는 악귀가 마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같았다”며 “공포, 악귀에 대한 얘기보다도 인간의 내면을 고찰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5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유니플렉스에서 개막하는 ‘검은 사제들’은 동명의 영화를 각색한 작품으로 뺑소니 교통사고 이후 의문의 증상에 시달리는 ‘이영신’을 구하려는 ‘김신부’와 ‘최부제’ 이야기를 그렸다. 클래식, 팝, 포크 장르 음악을 고루 담았으며 선과 악의 경계를 오가는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극의 핵심이다.

퇴마의식, 악귀 등을 다룬 오컬트 뮤지컬은 그간 국내 무대서 흔치 않았기에 관객에겐 반가운 장르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그럴듯하게 표현해내는 게 오 연출가와 모든 제작진의 큰 숙제다. 뮤지컬 ‘호프’에서 손발을 맞춘 강남 작가, 김효은 작곡가, 신은경 음악감독, 채현원 안무감독이 함께 머리를 맞댔다.

“영화에선 마귀의 기운을 쥐와 바퀴벌레가 나타나는 컴퓨터그래픽(CG)으로 표현할 수 있잖아요. 저희에게는 제한적 무대 안에서 안무, 소품, 의상, 음향, 노래를 활용해 최대한 관객의 상상력을 끄집어내는 방법뿐입니다.”

언제부턴가 배우들 사이에선 오 연출가가 작품을 맡았다고 하면 퇴장 없는 ‘빡센’ 공연이라는 말이 돈다. 이번에도 배우들은 보이지 않는 악귀와 싸우며 쉼 없이 연기하고 노래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그는 “연습실에서부터 각 장면이 관객 눈에 어떻게 잘 보일지 토론하고 설득한다. 때로 배우가 먼저 ‘저는 퇴장 안 해도 괜찮다’고 할 때 정말 고맙다”고 했다. 이어 “다만 제 스타일 때문에 앞으로 작품 맡기 힘들 거라는 소문도 돈다”며 웃었다.

어렸을 때부터 “살아있는 반려 피카츄를 만들고 싶어서” 유전공학과에 진학했다는 그는 “생각보다 공대 수학이 어려워서” 공연 연출로 전공 진로를 변경했다. 2008년 뮤지컬 ‘록키호러쇼’ 연출가로 데뷔해 ‘킹 아더’ ‘그림자를 판 사나이’ 등을 맡았다. 어릴 적 소망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는 마치 피카츄처럼 현실 속에 없는 판타지를 무대 위에 매일 쓴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할 수 있는, 따뜻하고 단단한 판타지를 주고 싶다”고 했다.

김경수 김찬호 이건명 송용진 등 출연. 4만4000∼8만8000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