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비타민 ‘꼬막’…590년 전 조선 초기부터 양식 시작했다

뉴스1

입력 2021-02-07 07:29 수정 2021-02-07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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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션 제공)© 뉴스1

겨울이 제철인 꼬막이 우리 식탁에 오른 것은 꽤 오래전부터이다. 옛날에는 임금님 수라상이나 제사상에 오를 만큼 귀한 음식으로 대접받았지만, 지금은 양식기술의 발달로 서민들에게도 부담 없는 식자재가 되었다.

시중에 유통되는 국내산 꼬막류는 참꼬막, 새꼬막, 피꼬막(피조개) 3종이며, 크기와 조가비 겉면에 부챗살처럼 방사상으로 도드라진 줄기인 방사륵(放射肋)의 수로 외형상 구별이 가능하다. 크기는 피꼬막이 가장 크고, 그 다음이 새꼬막, 참꼬막이 가장 작다. 방사륵 수는 참꼬막이 17~20개, 새꼬막이 29~33개, 피조개가 42~43개로 확연히 차이가 난다. 또 참꼬막은 표면에 털이 없는 반면, 새꼬막과 피조개는 표면에 검은 솜털이 있다.

7일 국립수산과학원과 한국해양수산개발원에 따르면 참꼬막의 양식 역사는 1431년 편찬된 <태종실록(太宗實錄)>에 전남 여자만의 목포, 하대진포 등지에서 꼬막을 양식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대한제국 말에는 여자만, 득량만, 강진만 일대와 충남 태안군 연안에서 이뤄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여자만 일대에서 양식을 시도했으나 실패해 일본에서 종패를 이식해 치패(어린 조개) 증식이 이뤄졌다. 광복 이후 1958년을 기점으로 천해 간척지 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돼 본격적인 양식 개발이 진행됐다.

새꼬막 양식은 1908년 대한제국 말 이전이며, 1960년대 후반 순천만에서 자연 채묘에 성공하면서 종패 생산이 가능해졌다. 1970년대 들어 자연 채묘 성공으로 광양만에서 대량 양식을 시작했으며, 여자만에서는 시험 양식을 시작했다. 하지만 새꼬막 양식은 1990년대 중반 광양제철소 준공으로 광양만에서 새꼬막 양식이 불가능해져 여자만이 주산지로 자리 잡게 된다.

피조개 양식은 1970년대 신종 양식산업으로 굴 양식 기술이 확립되자 굴과 같은 부착생물이라는 점에 착안해 인공 종묘에 의한 대량 양식 방법을 추진했다. 1974년 피조개의 자연채묘 기술이 성공해 양식 기술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으며, 1975년에는 피조개의 채묘장 개발, 채묘와 중간 육성의 기초 기술 개발, 종묘의 양산 체제 확립으로 1979년 피조개의 산업적 양식체계를 확립했다.

꼬막류의 생산량은 2007년 2만 8000톤 이상 생산된 이후 크게 감소해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연 5000톤 내외의 생산량을 보이다가 2018년 1만 4000톤 정도로 회복했다.

전문가들은 꼬막류의 생산량 감소 원인으로 지구온난화 등에 따른 해양 환경 변화, 성장이 빠른 개체부터 채취·판매함으로써 종의 열성화와 우량 치패 자원 감소, 장기간 연작(連作)에 의한 양식 어장의 환경 악화 등을 꼽고 있다.

참꼬막과 새꼬막은 대부분 내수용으로 소비되며, 피꼬막은 전체 생산량 중 약 42%(5900톤)가 활패, 냉장 및 냉동 형태로 수출되고 있다. 현재 국내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참꼬막은 연간 100톤 이상, 새꼬막은 연간 700톤 이상, 피조개는 연간 70톤 이상 수입되고 있다.

꼬막은 최근 ‘꼬막비빔밥’의 인기와 함께 가정간편식(HMR) 수산가공식품에 대한 소비자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꼬막고추장, 꼬막된장, 꼬막쌈장, 꼬막 건포, 꼬막 다시다 등 다양한 제품이 개발됐다. 또 편의점용 꼬막무침 캔, 남도꼬막비빔밥, 남도꼬막정식, 꼬막삼각김밥 등 각종 도시락까지 출시됐다.

한편 벌교가 꼬막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전라남도 동부 해안의 벌교와 인근 도시인 여수, 순천, 고흥을 잇는 여자만의 좋은 갯벌로 맛과 영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여자만은 파도의 영향을 적게 받아 일찍이 갯벌이 발달했으며, 모래가 거의 없고 오염되지 않은데다 민물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면서 유기물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여자만은 우리나라에서 갯벌생태가 가장 좋은 2등급이며, 생물종 다양성과 생태 가치로 인해 2003년 연안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세종=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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