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의 ‘희생’을 환자는 바라지 않습니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

입력 2021-02-04 03:00 수정 2021-02-04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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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환자보호자의 날’ 수기 공모 수상자들의 간병 노하우
한 사람의 ‘독박 간병’은 위험… 가족 구성원이 역할 분담해야
오랜 간병에 지치지 않으려면 잠시라도 개인 충전 시간 필요
힘든 감정 억지로 숨기지 말고, 심리상담사와 고통 나누세요



동아일보와 한국비엠에스제약이 지난해 12월 16일 ‘제1회 환자보호자의 날’을 맞아 진행한 수기 공모전에 총 82명의 사연이 접수됐다. 이번 공모전은 암 환자 치료의 동반자인 환자 보호자의 노고와 이들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기획됐다.

이번에 접수된 수기에는 부모, 자녀, 형제, 친인척의 입장에서 환자를 돌보는 데 최선을 다한 보호자들의 절절한 심정이 담겼다. 보호자들은 환자 곁에서 동병상련하면서 자신이 환자가 되기도 했다. 이를 극복하는 과정도 상세히 담겼다.

공정성을 위해 3차 심사까지 진행된 이번 수기 공모전의 심사위원단에는 백진영 대표(한국신장암환우회), 문성호 작가 등 총 5명이 참여했다. 이번 공모전에선 대상 1편, 최우수상 2편, 우수상 4편 등 총 7편의 수상작이 나왔다. 대상 수상작은 동아닷컴(www.donga.com·본문 하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심사위원들은 환자를 돌볼 때 나타나는 문제와 이를 해결하는 과정이 잘 드러난 사연을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현재 시중에는 환자 보호자를 위한 구체적인 지침이나 조언서가 없는 상황이다. 환자 보호자들의 생생한 사연을 통해 병간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우울감 등 정신적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정리했다.




○‘독박 간병’은 ‘노(NO)’…추억 쌓기 나서야

경제 상황이 좋다거나 사는 곳이 가깝다는 이유 등으로 가족 중 한 사람이 간병 의무와 책임을 떠맡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독박 간병’은 환자 보호자가 금방 지치는 원인이 된다. 또 다른 환자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이번에 제출된 수기에서도 아버지 간병을 전담하던 어머니가 쓰러져,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환자가 된 사례가 나온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선 가족 모두가 참여하는 공동 간병이 필요하다. 가족들이 모여 각자 보호자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을 나누고 서로의 수고에 대한 감사와 응원을 하는 게 중요하다.

환자가 조금이라도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가족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도 도움이 된다. 멀리 떨어진 가족들을 위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단체 채팅방 등을 만들고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는 게 좋다. 가족에게 집중하고 사랑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별 연습을 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환자의 마지막 기억은 병실 대신 가족이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힘든 걸 인정해야…‘버킷리스트’도 추천

환자 보호자는 자신이 힘들어도 환자에게 이런 감정을 전달하기 어렵다. 가끔 보호자도 웃음이 필요하지만 병마에 시달리는 환자를 보고 웃거나 행복한 것에 죄책감을 가질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마음가짐은 환자와 보호자 모두를 힘들게 만든다. 힘든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환자에게 터놓고 이야기해야 함께 이겨낼 수 있다. 전문적인 심리 상담도 큰 도움이 된다. 만약 필요하면 지역 주민센터에서 상담 신청을 할 수 있다.

보호가 필요한 암 환자에게 꼭 필요한 것은 살아야 할 동기와 목표다. 또 이를 함께 실천하는 가족의 존재가 필요하다. 환자와 보호자가 함께 삶의 의지를 담은 버킷리스트를 만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면서 하나씩 지워가는 과정에서 더 행복해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환자 보호자의 개인 시간을 가지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보호자는 흔히 휴일이나 휴가도 없이 환자 간병에만 매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보호자가 환자와 떨어져 자신만의 시간을 잠시라도 갖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짧은 시간이라도 본인을 위한 시간을 갖고 걱정과 근심을 잊어야 한다. 마음의 여유를 찾아야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의 가치를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를 위해선 가족들의 간병 분담이 필수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 likeday@donga.com
환자보호자의 날 수기공모전 대상


다음 생에도 전 꼭 아빠, 엄마 딸로 태어날 거예요
- 안선미

수업을 마치고 교실에서 나오니 내 휴대폰으로 전화가 14통이 와있었다. 동생, 남편 등 암으로 몇 년째 누워 계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아빠가 이제 진짜 내 곁을 떠나시는 건가?

전화기를 손에 잡고는 떨려서 정작 전화를 걸지 못하고 교무실에 앉아 남들 모르게 눈물만 닦았다. 교무실을 우연히 지나가는 우리반 녀석이 날 쳐다보더니 선생님. 우세요?”라고 말을 한다. 갑자기 교무실의 모든 사람들이 날 쳐다보며 걱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아니예요. 좀 전에 책을 읽었는데 너무 슬픈 문귀가 있어서요……. 저 안울어요.” “아-”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혼자 휴대폰을 들고 화장실로 나왔다.

그리고 나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누난데 왜 전화했어? 혹시……” “누나 왜 그렇게 전화를 안받아. 지금 아빠 병간호하던 엄마가 저 혈당에 쇼크로 쓰러지셔서 병원 응급실에 계신다고. 아빠보다 엄마가 더 먼저 돌아가시게 생겼어. 어떻해” “그럼 아빠는? 까다로워서 간병인도 쓸 수 없는 우리 아빠는 누가 간호해?”

지금 아버지가 문제야? 불쌍한 우리 엄마는 어떻해. 몇 년째 저렇게 아버지만 간호하다가 저렇게 쓰러지셨는데. 무서워 죽겠어. 엄마가 눈도 파르르 떠시고 의식도 없으신데. 어떻해. 누나” 하며 울어버리는 동생.

전화를 끊고는 교장선생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학교 밖으로 나왔다. 차에 앉아 시동을 켜려고 하는데 차 앞에 놓아둔 엄마 사진에 시선이 고정됐다. “엄마. 엄마. 엄마. 아버지도 아프신 데 엄마까지. 정말 안되요.” 한참을 울다가 엄마 아빠가 계시는 대전으로 향했다. 떨리고 무서운 마음에 솔직히 운전할 자신이 없었지만 차가 없으면 대전에 가서도 대중교통을 이용해 여기저기를 다녀야 하는 걱정이 앞서 난생 처음으로 고속도로를 운전해서 달렸다.

엄마가 계시는 대학병원 응급실. 조용이 누우셔서 의식이 없으신 엄마를 쳐다보는 순간 참 이상하게도 금방까지 흐르던 눈물이 멈춰지고 우리 엄마를 살려야 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확 들었다. ‘내가 지금 울고 정신을 놓아버리면 우리 엄마, 아빠는 어떻하라고. 안돼. 안돼. 힘을 내야지.’ 내 자신을 위로하면 달랬다.

그리고는 여기 저기서 울고 있는 가족들을 모아 회의를 시작했다. ‘현재 의식이 없으신 엄마는 나와 여동생이 일주일 씩 연가를 내고 병간호를 하고, 까다로우신 우리 아빠는 아들과 사위 3명이 2, 3일씩 번갈아 가며 병간호를 해보고, 안되면 간병인을 써보자. 서로 서로 지치지 않게 잘 챙겨 먹으면서 엄마 아빠에게 집중하고, 경비는 어느 한집에서 내지 말고 각자 조금씩 집집마다 돈을 내어 공동 경비를 마련하고 그걸 지출하면서 병간호를 해보자’ 였다.

그리고 난 후 양쪽 병원을 오가는 힘든 병간호가 시작되었다.

“환자분이 기력이 많이 떨어지셨나 봐요. 대부분 저 혈당에 쇼크가 오면 금방 깨어나시는데. 이틀째 깨어나시지를 않네요. 아마 깨어나셔도 고혈압약, 당뇨약을 복용하시면서 평생 관리를 하셔야 할껍니다.”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그냥 고개가 떨구어졌다.

하루 종일 내가 엄마만 바라보고 있는데도 의식이 없으신 우리 엄마. 소변에 대변을 받아내며 엄마의 몸무게가 너무 가벼워졌다는 걸 느꼈고 ‘암환자인 아빠의 병간호는 항상 우리 엄마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방관하고 살았던 내 자신과 우리 자식들이 엄마에게 너무나 무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더욱 죄송했다.

나흘만에 의식을 차리신 우리 엄마. 깨어나자 마자 본인 걱정이 아닌 아빠 걱정을 하시면서 아빠가 계시는 병원으로 가시겠다고 주섬주섬 옷을 입으셨다. “안돼 엄마. 지금 엄마 혈압에 당뇨도 오셨데요. 평생 약도 드셔야 하고 지금보다 기력이 더 떨어지면 합병증이 오셔서 돌아가실지도 모른데요. 아빠는 아들하고 사위가 잘 보살피고 있으니까. 걱정마시고 병원에 좀 더 계셔줘요.”

나의 말에 다시 옷을 벗고 누워 계시던 엄마. “내가 없으면 니 아빠 불쌍해서 어떻해. 입도 까다로워서 아무거나 드시지도 않고 내가 없으면 하루 종일 말 부칠 사람도 없을텐데…….” 하고는 한참을 우셨다.

그것도 잠시 내가 점심을 먹고 은행 업무를 보려고 나간 사이 엄마는 택시를 잡아타시고 아버지가 계신 병원에 가셔서는 몇 시간을 계시더니 또 쓰러지셨다. 그리곤 다시 사흘간 깨어나지 않으시는 우리 엄마. 난 그렇게 또 다시 엄마랑 병원에 2주간을 있으면서 엄마, 아빠가 빨리 괜찮아 지시기를 기도하며 매일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엄마가 주무실 때 왼쪽 눈을 자주 깜박이시는 것도, 엄마의 얼굴 왼쪽 볼에 점이 두개 있다는 것도, 엄마의 손발톱을 깎으면서 엄마의 험한 발이 참 예쁘다는 생각도 처음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달이 지나고 엄마가 퇴원을 하시게 되어 다시 우리들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 엄마는 예전에 암환자인 아버지를 혼자 돌보시던 강하고 부지런한 그런 엄마가 아니셨다. 평생 혈압약에 당뇨약을 드시면서 식사 조절을 하셔야 하고 조금만 힘들어도 식은 땀을 흘리셨으며 오랜 아빠의 투병으로 인해 마음도 많이 상하셔서 우울증도 찾아와 너무나 약해진 모습의 엄마로 변해 있으셨다.
아~. 정말 어찌하면 좋을까? 오랜 고민을 하다 우리 가족들은 다시 모여 엄마, 아빠를 모두 살리기 위한 다양한 PROJECT를 준비했다. 우선 현재 우리 가족이 가진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정말 단순했다. 지금 우리 가족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아빠의 병 간호를 몇 년째 엄마에게만 맡겨 두어 정작 엄마가 병들어 가시는 걸 방치했다는 점이고, 아빠의 암으로 인해 가족 누구도 편하게 웃고 행복할 수 없는 그런 암울한 가족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버지 담당 의사 선생님과 상의를 하였다. 암전체가 몸에 퍼져 가망이 전혀 없으시고 길게 사시면 한달. 아니면 내일이라도 당장 돌아가실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을 듣고는 아버지와 상의를 하여 아버지를 병원에서 과감하게 퇴원시켰다. 물론 치료를 멈춘 건 아니었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모시고 가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조금이라도 행복한 생활을 하실 수 있도록, 그리고 가족 모두가 암환자와 함께 행복하게 웃을 수 있도록 ‘가족문화’를 바꾸어 보자는 것이었다.

일단 엄마도 아버지와 떨어지셔서 엄마 만의 시간을 가지시는 게 지금 현재 가장 중요한 일이라 판단되어 일주일에 두 번은 요가를, 두 번은 노래 교실에 보내 드리고 우울증 치료에 집중 하시도록 도와 드렸다.

엄마가 아빠를 떠나 보내게 되었을 때 본인의 일이 없으시면 더욱 힘들어 하실까 봐, 요리를 잘하시는 엄마를 위해 노인 일자리 창출 아르바이트를 알아보고 소일거리도 찾아 드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남동생이 과감하게 내린 결정이 참 고마운데, 엄마, 아빠를 위해서 직장을 대전지사로 옮기고 엄마, 아빠가 계신 본가로 들어와 두 분을 돌봐 드렸다. 나와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방학이면 가족들과 함께 대전에 내려와 암환자가 있는 어둡고 슬픈 가정이 아닌 즐거움을 함께하는 가족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동생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공부하여 좀 더 체계적으로 엄마, 아빠를 보살폈고, 나는 아빠가 좋아하시는 여행을 계획하여 세번이나 제주도, 남해, 여수 밤바다 등을 즐겁게 다녀왔다.

하루 종일 누워 계시는 아빠를 위해 가족 단톡방을 만들어 하루 하루 소중한 시간을 공유했고, 아빠가 좋아하시는 나훈아의 ‘홍시’, ’울엄마’, 누구의 노래인지 모르지만 ‘회전의자’를 가족톡에 올려 들으시고 노래를 들으시고 노래를 부르시도록 마이크도 사드렸다.

조금이라도 야채를 길러서 드시기를 원하시는 두 분을 위해 텃밭을 분양 받아 밭을 일구었고, 또 나무에 버섯을 키우고, 강아지를 키우면서 병원에서의 마지막이 아닌 가족과 추억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서로서로 가족에게 집중하고 그리고 사랑하며, 행복하며, 웃으며, 자연스럽게 아빠와 멀어지는 이별 연습을 하는 간병 생활로 우리집의 간병 패턴을 바꾸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거 같다.

그 다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시는 아빠를 위해 함께 여기 저기를 돌면서 맘에 들어 하시는 곳에 가족묘도 마련해 그곳은 아빠만 가는 곳이 아닌 시간이 흘러 우리 가족 전체가 자연스럽게 가는 곳으로 만들었고, 일년에 8번이나 지내던 제사도 과감히 없애 아빠가 계시지 않을 때의 엄마의 수고를 덜어 드렸다.

마지막으로 간 병원에서 한달, 아니 그 다음날이라도 돌아가실 수 있다고 집에서 준비를 하라고 하셨지만 우리 아빠는 퇴원 후 2년을 더 재미있게 사셨고 마지막으로 떠나시던 날도 가족들이 모두 바라보는 가운데 눈물을 흘리시며 엄마를 부탁하시고 행복하게 눈을 감으셨다.

이렇게 행복한 투병 생활을 하시고 아빠가 돌아가신 지 10년.

엄마는 아직도 혈압에 당뇨를 가지고 사시지만 우울증은 깨끗하게 나으셔서 늘 웃으시는 동네의 인자한 할머니가 되어 계시고, 아직도 그때 시작하신 주민센터의 노인 일자리 창출 ’반찬 봉사하기’ 활동을 하시며 손주들에게 조금의 용돈을 주시는 멋진 할머니가 되어 계신다.

얼마전 ‘환자 보호자의 날’ 수기 공모를 보면서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울컥 해 혼자 울었지만 정말 글을 써보고 싶었다.

우리 가족이 너무 많이 실수를 했지만 그래도 이글을 보시는 다른 가족분들은 우리집과 같은 실수를 하시지 않기를. 그리고 암환자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고 가족의 문화를 바꾸고 생각을 바꾸면서 행복한 암환자 보호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꼭 말하고 싶었다.

암환자의 보호는 누구 한 사람의 몫이 아니고 가족 전체가 도우며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암환자’ 뿐 아니라 ‘암환자의 보호자’ 역시 보호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의식 변화와 물질적, 환경적 지원이 꼭 필요하다는 걸 덧붙여 말하고 싶다.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 힘들게 숨을 내 뱉으시며 “내 생애 마지막을 병원이 아닌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게 해줘서 너무 고맙다. 그리고 힘없고 불쌍한 너네 엄마를 부탁한다. 꼭~, 꼭! 사랑한다.”하시던 아버지 “아빠, 전 다음 생에도 꼭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날 거예요.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사랑해요.”

세상에 모든 암환자 여러분 그리고 가족분들. 힘내세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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