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주기, 관제기부, 관치금융이 ‘신복지 국가’의 실체

김광현 기자

입력 2021-02-03 16:06 수정 2021-02-03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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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일 국회에서 행한 교섭단체연설의 제목은 ‘국민이 국가의 역할을 묻습니다. 코로나를 넘어 신복지국가로’이다. 이날 연설은 유력한 대선주자로서 대선공약의 기초 버전으로 여겨져 더욱 눈길을 끌었다.

‘신복지’는 말 그대로 새로운 복지시스템을 갖추겠다는 뜻이다. 이 대표는 이것이 당장은 코로나시대, 길게는 양극화시대에 맞는 ‘시대정신’이고, ‘시대정신’에 걸맞은 ‘국가의 역할’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복지의 구체적 내용들을 들여다보면 한 마디로 ‘퍼주겠다’는 것이다. 현재 상황이 나라 곳간을 풀 때이고 채울 때가 아니라는 말인데, 현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와 여당이 줄기차게 슈퍼 팽창예산 집행에 매달린 점을 감안하면 코로나19는 ‘예산 잔치’의 핑계에 불과해 보인다.

이 대표가 제안한 영업제한 손실보상제, 협력이익공유제, 사회연대기금 등 이른바 ‘상생연대 3법’과 ‘보편적 사회보호’라고 명시적으로 밝힌 신복지제도의 세부 내용들은 ‘아낌없이 퍼주겠다’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그 중에서 비교적 재정·기업 등 경제 분야와 직결되는 ‘상생연대 3법’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름과는 달리 현실에 적용하기에 적잖은 문제점이 있는 법들이다.

영업제한 손실보상제는 이미 많이 거론된 것처럼 손실보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를 법으로 제도화한다는 것이 쟁점이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이 다른 주요국들의 사례를 찾아봤더니 법으로 정해 지원하는 국가는 없었다는 말을 했다가 경을 쳤다. 지원하되 법제화가 아니라 해당 재난이 발생했을 때 유연하게 대처하는 게 좋다는 취지였으나 정세균 국무총리로부터 “대한민국이 기재부의 나라냐” “개혁의 저항세력”이란 말까지 들었다. 다음날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제도화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백기를 들고서야 법제화하는 방향으로 정리됐다.

협력이익공유제는 코로나19와 관계없이 문재인 대통령이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방안으로, 국정과제 100대 사업에 포함돼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양극화를 해소한다는 게 명분이다. 이 대표는 “협력해 이익을 만들고, 그 이익을 부분적으로 공유하자는 것”이라며 “미국 영국 등 자본주의 선진국에는 성공 사례가 많다”고 했다. 부분적으로 옳은 말이다. 선진국에서 도입하는 사례가 많기는 하지만 정부와 국회가 나서 이를 법으로 정하는 나라는 없다.

일본 도요타, 미국 크라이슬러 스코어, 이탈리아 피아트 같은 자동차회사들이 대표적이다. 이는 대기업들이 성과를 거뒀을 경우 협력업체들에 나눠주는 성과공유제 형태이자 일종의 인센티브로 이용되고 있다. 물론 대기업과 협력사들이 자율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이윤 분배를 법으로 강제하는 나라는 없다.

이 대표는 ‘상생연대 3법’의 하나로 코로나19로 인한 피해자를 돕자는 차원에서 정부 기업 개인이 ‘사회연대기금’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2015년 한중FTA 비준 당시 조성한 ‘농어촌상생협력기금’과 이명박 정부 당시 조성한 ‘새희망 홀씨’를 사례로 들었다.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은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신년기자회견에서 코로나 이익공유제 도입 계획을 밝히면서 언급한 것이기도 하다. 한중FTA로 인해 돈을 벌게 된 제조업 등 혜택을 보는 기업들이 피해를 보는 농어촌에 지원금을 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이 적잖다. 이 대표가 코로나 이익공유제 카드를 처음 꺼내들었을 때 정세균 총리는 “이를 제도화하려면 국민적 공감대가 먼저 이뤄진 후에 논의가 이뤄지는 게 바람직하다”며 “나는 그런 용어(이익공유제)를 사용하지 않는다”며 이 대표와 결이 다른 발언을 내놓았을 정도다.

문재인 대통령이 11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청와대 제공) 2021.1.11/뉴스1
무엇보다 대통령과 이 대표가 사례로 든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은 성공사례가 아니라 대표적인 실패사례로 꼽히는 기금이다. 원래 취지대로라면 FTA로 혜택을 봤다는 기업들의 출연금이 기금의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중FTA로 본 혜택이 거의 없을 내수 위주의 공기업 출연금이 전체의 70~80%에 달한다.

2017년부터 10년 1000억 원씩 1조 원 목표로 진행된 이 기금은 3년차인 2019년 목표치인 3000억 원의 24%인 731억 원을 조성하는 데 그쳤다. 그나마도 민간기업은 11.3%에 불과하고 공기업이 88.6%를 냈다. 이후 다소 개선되기는 했지만 지난해 말 현재 조성기금 1243억 원 가운데 민간기업은 29.4%에 머물러 있고, 공기업 출연금이 877억 원으로 70.6%를 차지한다.

‘새 희망 홀씨대출’은 은행들의 수익이 막대한 데 저신용자 서민들은 은행을 이용하기도 쉽지 않다며 이익을 내놓으라는 정치인들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도입된 제도다.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이 은행의 영업이익 10%를 서민대출로 법제화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은행연합회가 ‘자발적’으로 영업이익 10%를 서민대출에 할당해 각 은행에서 갹출했다. 강제로 당하느니 자발적으로 내자는 취지였다는 게 당시 은행연합회장의 해명이었다.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실패한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이 마치 상생협력의 성공모델처럼 소개된 데 이어 여당 대표마저 이를 다시 인용한 셈이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또 자발적인 동기로 포장된 관치금융의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인 ‘새 희망 홀씨’가 상생모델로 다시 등장했다니 실소를 금하기 어렵다. 이 대표가 연설의 제목으로 삼은 ‘국가의 역할’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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