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코로나로 세상뜨며 100만원, 폐지팔아 55만원… “백신 같은 기부”

강승현 기자 , 부산=강성명 기자 , 이청아 기자

입력 2021-02-02 03:00 수정 2021-02-02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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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개인 기부 1년새 12억→58억
“다들 힘들죠” 더 어려운 이웃 챙겨
혈액부족 사태에 개인 헌혈도 증가




[단독]코로나 겨울, 나눔은 5배 뜨거웠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힘겨운 이웃들에게 보탬이 되고 싶었어요.”

지난해 12월경 서울 도봉구 창4동주민센터에는 누가 보냈는지 모를 쌀 20포대가 배달됐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취약계층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수소문 끝에 알아낸 ‘얼굴 없는 천사’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같은 동에 사는 50대 장애인 여성이었다. 자신도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뒤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였지만 이웃을 돕는 일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끝끝내 익명 기부를 원한 그는 “요즘 코로나로 다들 힘들지 않냐. 평소 주위에서 도움을 많이 받아 조금이나마 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온 국민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어려운 주변 이웃을 살피고 함께 극복하려는 마음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서울에선 지난해 개인 기부금이 전년(2019년)보다 5배 가까이 늘어났으며,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모금액도 서울과 부산, 전남북 등에서 역대 최고액을 기록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해 1∼12월 전달된 개인 기부금은 약 58억 원으로 2019년 약 12억 원보다 46억 원이 늘어났다. 약 4.8배로 늘어난 수치다. 기업과 단체 기부금을 합치면 2019년 60억3500만 원에서 103억4500만 원으로 늘었다. 시 관계자는 “개인 예술품 기부 등도 늘었고, 코로나19 치료에 써달라며 의료기관 등에 돈을 내놓은 개인 기부자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국제아동구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은 지난해 국내 개인 후원금이 약 630억 원으로 2019년 559억 원보다 13%나 늘어났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도 개인 기부가 2019년 2073억 원에서 지난해 2661억 원으로 크게 뛰었다. 코로나19로 혈액 부족 사태까지 빚었던 헌혈조차 개인 기증자는 오히려 2019년보다 약 2만4000명이 증가했다고 한다.

예종석 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은 “다들 코로나19를 감안해 목표액을 낮추는 분위기였는데 국민들은 더 적극적으로 이웃과 나누고자 했다”며 “위기가 닥칠수록 함께 이겨내려는 한국인의 DNA가 발휘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


코로나로 세상뜨며 100만원, 폐지팔아 55만원… “백신 같은 기부”







기초수급비 모아 기부한 장애인

보건소에 핫팩 가져온 초등생…
코로나속 폐업-실직 겪으면서도 “이웃 돕겠다” 이름없이 스스로 나서

전문가 “세계에 드문 공동체 의식”




“남편이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 남긴 말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고통받는 불우이웃을 도우라’는 거였어요.”

서울 은평구에 사는 김영호 씨(62)는 8일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12월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뒤 겨우 20여 일 만에 병세가 악화돼 숨을 거뒀다. 평소 지역사회에서 어르신 목욕시키기 등 봉사활동에 적극적이던 고인이었기에 주위에선 더욱 허망해했다.

그런 김 씨는 코로나19로 삶을 마무리하면서도 자기보다 더 힘든 이웃들을 걱정했다고 한다. 부인 권영순 씨는 “남편이 떠나면서 당장 집안 생계도 걱정이지만, 남편은 ‘이웃을 도와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며 “나 역시 모두가 어려운 코로나 시국이지만 더 힘든 사람을 돕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권 씨는 고인의 장례가 끝난 뒤 은평구 녹번동주민센터를 찾아 100만 원을 기부했다.

코로나19가 모든 걸 뒤덮어 버린 세상.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뚫고 희망의 햇살을 비추고 있는 건 특별한 소수가 아니다. 경기 악화로 실직과 폐업이 늘어나며 갈수록 사회 분위기가 피폐해지고 있지만, 이를 극복하려고 손을 내민 건 평범한 우리네 이웃이었다. 이들 상당수는 “별것 아니다”라며 자신의 선행을 밝히려 들지도 않았다.


○ 가진 게 없어도 마음만은 누구보다 넉넉해

1일에도 대구 동구 신암5동 행정복지센터에는 날개 없는 천사가 다녀갔다. 그는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센터 직원에게 “좋은 곳에 사용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와 현금 150만 원을 두고 사라졌다.

지난달 28일 서울 양천구 신정2동주민센터에도 익명의 기부자가 보낸 쌀 10포대가 배달됐다. 이 남성은 마트 직원에게 “생김새 등을 일절 밝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이웃을 위해 나선 시민 영웅들은 별세한 김영호 씨 가족처럼 자신들의 형편도 궁핍한 이가 적지 않았다.

지난해 12월경 부산 사상구 모라1동 행정복지센터에 1500만 원을 건넨 이는 자신도 기초생활수급자인 장애인이었다.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은 기부자는 “기초생활수급비에 자신이 조금씩 모은 돈을 보탰다”고 말했다.

경기 안양시에 사는 전직 교도관 이상일 씨(74)는 지난해 말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55만3810원을 기부했다. 새벽마다 나가 폐지와 고물을 주워 파는 그는 동전이 가득 담긴 플라스틱 우유병을 들고 왔다.

비슷한 시기 대구 남구의 이구형 씨(78)도 2년간 폐지 등을 팔아 모은 50만 원을 내놓았다. 같은 동네에 사는 어르신 13명은 이 씨와 합심해 220만 원을 모아 대구 사랑의열매에 전달했다. 이 씨는 “힘들게 번 돈이지만 추운 겨울을 보낼 이웃을 생각하니 전혀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어린이들의 ‘고사리 손 기부’도 이어졌다. 지난달 15일 경북 영주시의 한 보건소에는 ‘힘내세요’라는 응원 메시지가 담긴 손 편지와 함께 핫팩 700여 개가 도착했다. 이 지역 초등학생 이모 양(9)이 오랫동안 모은 돼지저금통을 깼다고 한다.

○ 위기를 극복하는 한국인 특유의 공동체 의식
지난해 헌혈자 수는 261만1401명으로 2019년에 비해 17만 명 이상 줄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 탓에 기업 및 단체의 참여가 줄었기 때문이다.

한 해 내내 혈액 부족에 시달렸던 혈액원을 살린 건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지난해 개인 헌혈자 수는 2019년 대비 2만4178명 늘어난 196만7042명을 기록했다. 백경순 보건복지부 혈액장기정책과장은 “혈액 수급에 큰 어려움을 겪던 5월에 재난문자 한 통에 전주보다 2배 이상 많은 시민이 헌혈에 동참했다”며 “개인 헌혈자들의 적극적 참여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시민들의 나눔 행렬을 “세계에서 보기 드문 공동체 의식”이라고 높이 샀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코로나19 시대를 거치면서 전 세계가 이웃과 담을 쌓고 극단적 개인주의로 가는 조짐을 보이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공동체주의가 살아 있다는 걸 보여준 증거”라며 “한국의 에너지나 발전의 동력은 결국 국민의 힘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줬다”고 평가했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도 “코로나19 시국은 정신적 물질적 불안이 큰 상황이라 남을 돌볼 여유가 없는 게 일반적이다. 국내의 나눔 현상은 매우 이례적”이라며 “코로나19로 힘겨운 이들을 매일 주변에서 직접 겪으며 적극적인 ‘동참 의식’이 커진 것 같다”고 했다.

강승현 byhuman@donga.com /부산=강성명 / 이청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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