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라산 줄기에 금강 물길 금상첨화… 재물도 인심도 함열이어라

익산=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입력 2021-01-30 03:00 수정 2021-01-30 04:13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여행 이야기]전북 익산
작은 마을에 만석꾼 셋
세 부잣집의 위용
함라마을에 깃든 기운
옛사람들 오간 곰개나루


전북 익산시 함라산 뒤편 금강변에 있는 웅포 곰개나루. 오토캠핑장, 유람선, 황포돛배 관광 등을 갖춘 휴양 명소이자 서해 5대 낙조(落照) 절경지 중 하나다. 과거엔 금강 물길을 따라 바다를 오가는 물류의 중심지였는데, 함라마을의 풍성한 농산물도 이곳에서 배에 실려 한양의 서강 마포나루에서 거래됐다.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 만석꾼 부자(富者) 3명이 살고 있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간 세 부자는 딱한 형편으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경쟁하듯 베풀기를 실천했다. 일제의 가혹한 한반도 수탈 시기 때도 이 마을에서는 숟가락 하나만 들고 있으면 배고픔을 면할 수 있었다. 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라마을(함열리)의 3부잣집 얘기다.함라마을 세 부자의 선행은 당시 전국에 소문났다. 동아일보는 빈한한 동포를 돕기 위해 ‘2개월간 130여 명에게 배식(配食)한 함열 3부자’ 미담을 보도했다(1932년 6월 24일자). 판소리단가 호남가에 ‘풍속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이라’란 가사가 등장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 풍요 기운 즐기는 골목길 여행

만석꾼은 지금으로 치면 재벌 반열에 오른 부자다. 불과 2.8km² 남짓한 촌락에서 만석꾼이 3명이나, 그것도 동시대에 출현한 것은 보기 드문 사례다. 대체 어떠한 마을이기에 이런 부자들을 배출해 냈을까.

함라마을은 옛 담장과 골목길로 유명하다. 직선으로 내뻗거나 곡선으로 휘어지는 골목길을 따라 토석담(흙다짐에 돌을 박아놓은 담), 전돌에 동식물을 새긴 화초담, 황토에 짚을 섞어 놓은 흙담 등 다양한 형태의 담장이 시선을 끈다.

높은 곳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면 옛 담장길 대부분이 규모가 큰 세 고택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마을 중심부에 삼각형 구도로 배치된 이 고택들이 바로 만석꾼 이배원, 조해영, 김병순 3부자가 살던 터다. 그러니까 이웃한 3부잣집 담장이 곧 마을 담장이 되고 담장 사이가 골목길이 되는 셈이다.

이배원 가옥의 사랑채는 원불교 교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마당의 동그라미 모양은 원불교의 상징을 표현한 것이다.
먼저 이배원 가옥. 3부잣집 중 가장 이른 1917년에 지은 집이다.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정도만 남아있는데, 사랑채 일부가 원불교 교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집을 널따랗게 두른 담장과 텃밭으로 가꾼 후원이 당시 어마어마하던 집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배원의 손자 이양몽 씨(전 익산시의회 의원)는 “누룩 장사로 부를 축적한 조부께서 금강과 한양의 서강 마포나루를 오가는 쌀 무역에도 손을 대 큰돈을 벌었다. 당시 쌀과 맞바꾼 엽전이 너무 많아 배가 가라앉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배원은 자신이 쌓은 부에 대해 겸손했다. 매달 초사흘과 보름날이 되면 목욕재계(沐浴齋戒)한 후 집 뒤 장독대에서 하늘에 감사드리는 제를 올렸고, 적선(積善)과 적덕(積德)을 실천해 왔다고 한다.

조해영 가옥의 꽃담. 꽃담은 집안 여성의 안채를 가리는 용도로 쓰였는데 옛 대갓집의 향취를 물씬 풍긴다.
이배원 고택(古宅) 대문에서 오른편으로 조해영 가옥이 있다. 1918년에 지은 이 집은 출입문만 열두 개여서 ‘열두 대문 집’으로 불렸다. 궁궐 짓는 도편수를 불러 3년 걸려 지었을 정도로 가세가 대단했다. 조해영은 농장 경영과 광산 등에 투자해 떼돈을 벌었다. 부를 쌓기까지는 근검과 절약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농사용 거름으로 쓰이는 오줌이 그냥 버려지는 게 아까워 오줌통에 오줌 누는 아이들에게 대추 한 알씩 주는 식으로 거름을 모았다고 한다.

조해영 가옥은 현재 사람이살고있지않지만 과거12개대문을 갖춘 가옥으로, 특히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했다.
조해영 가옥은 현재 안채와 일본식 별채, 문간채 정도만 남아있으나 정원과 연못, 집안에 둔 농장 사무실 등이 화려했던 옛 시절을 증언하고 있다. 조해영 가옥에서 특이한 것은 헛담인 꽃담. 헛담은 집안 여성을 위해 안채를 가리는 용도인데, 헛담 바깥벽이 경복궁 전각의 꽃담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이배원, 조해영 두 집안은 사돈 간이기도 하다. 경주 이씨 이배원의 여동생이 임천 조씨 조용규(아들 조해영) 집안에 시집을 간 것이다. 현대의 재벌 혼맥과도 비슷하다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제일 나중에 지은 김병순 고택(1922년)은 전북에서 제일 크다고 소문난 99칸 대가옥이다. 김병순이 백두산 소나무를 가져와 안채와 사랑채를 지었다고 하는데, 세 집 중 유일하게 국가민속문화재에 이름을 올렸다. 현재도 후손이 살고 있지만 집 내부를 잘 개방하지 않는다.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공산주의 계열 친인척을 두었다는 이유로 심한 박해를 받은 집안 내력도 이유일 듯하다. 이 집도 길가에 높다랗게 세운 담장이 일품이다. 대문을 중심으로 양편에 굴뚝과 어우러진 점선무늬 회벽꽃담이 인상적이다.

3부잣집 담장을 끼고 한 바퀴 돌면 얼추 동네 한 바퀴를 다 도는 셈이다. 그러는 사이 부자 터의 풍요로운 기운도 즐길 수 있다. 좋은 터에 있다 보면 굳이 기운을 느끼려 애쓰지 않더라도 기분이 상쾌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여행에 동행한 풍수학자 최낙기 박사는 “함라마을은 전형적인 부자 터”라고 말한다. 마을 뒷산 함라산이 명당 터를 받쳐주고 있다는 것이다. 함라마을은 동쪽 저 멀리 익산미륵사지가 있는 미륵산 줄기가 평지로 내려와 보일 듯 말 듯 서쪽 함라산까지 이어지는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따라 함라산을 등진 채 동향(東向·동쪽을 바라보는 향)하고 있는 함라 3부잣집은 자신의 뿌리인 미륵산 쪽을 바라보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 형국을 이루게 된다. 최 박사는 “풍수학에서 회룡고조형 명당은 부(富)의 발복이 크다고 믿는데, 바로 경제인들이 선호하는 터”라고 평했다.

함라마을의 부는 우선 호남평야의 너른 들판이 기본이 됐다. 대지주를 배출할 만한 땅이 넘쳐나는 곳이다. 3부잣집 모두 땅에서 소출한 농산물이 부의 원천이 됐다. 이들 집안의 부가 나중에 쇠퇴하게 된 것도 8·15 광복 후 이승만 정부의 토지개혁으로 땅이 수용됐기 때문이다.

명당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마련이다. 시골마을 인구가 갈수록 줄어가는 추세에도 이 마을만큼은 예외다. 함열현 관아 터 뒤편으로는 주로 외지인들이 지은 호화스러운 주택들이 여기저기 들어서 있다. 이 마을이 부자 명당일 뿐만 아니라 조선 24대 헌종의 계비인 효정왕후를 배출한 길지(吉地)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효정왕후는 아버지 홍재룡이 함열현감으로 재직할 때인 1831년 이곳 함열현 관사에서 태어났다.

함라마을 지킴이 역할을 자처한 남궁승영 익산시의정회 이사는 “함열 남궁씨의 성지(聖地)로 여겨지는 이 마을은 명당 터 덕분인지 가뭄과 홍수의 피해가 다른 곳보다 현저히 적다”고도 말했다.

○ 곰개나루의 물길 따라

함라마을 전경. 함라 3부잣집은 마을 중심부에서 삼각형 구도로 배치돼 있다. 사진 아래가 이배원 가옥, 그 뒤쪽이 김병순 가옥, 오른편으로는 조해영 가옥이 있다.
함라마을을 충분히 즐긴 후 함라산 뒤편, 금강변의 곰개나루로 향한다. 예로부터 수관재물(水管財物), 즉 물길은 재물을 관장한다고 했다. 물길을 따라 사람과 재화가 몰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함라마을의 부를 일구는 데도 한몫한 곳이 바로 금강 곰개나루다. 이곳에서 함라 부자 이배원은 해운업으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금강 물을 마시고 있는 곰 머리의 형상’이라 하여 웅포(熊浦)로 불리는 곰개나루는 예전엔 물산과 사람들로 흥성했으나, 지금은 금강의 노을빛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일몰을 촬영하기 위해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아온다. 역사적으로는 고려 우왕 6년(1380년) 최무선 장군이 왜구의 배 500여 척을 격침시켰던 진포대첩의 현장 터로도 알려졌다.

나바위성당 바로 뒤편에서 성당을 굽어보고 있는 ‘김대건 신부’상. 정상(정자) 뒤편에는 마애삼존불상이 있다.
곰개나루에서 강경포구로 이어지는 금강변을 따라 난 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도 좋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근처에 나바위성당(전북 익산시 망성면)이 자리 잡고 있다. 납작한 바위가 널려 있다고 해서 ‘나바위’로 불린 이곳은 한국 천주교의 성지로 불린다. 1845년 한국인 최초로 사제가 된 김대건 신부가 고국으로 돌아와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또 1907년에 완공된 나바위성당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옥과 고딕 양식이 조화를 이룬 건축물로 평가된다.

나바위성당 부지 내 야트막한 화산(華山)에는 ‘평화의 성모’상이 있는데, 안내 간판이 재미있다. 원래 이 터에 암자를 짓고 살던 스님이 스스로 떠나게 된 사연을 적으면서 이 터가 ‘전라북도 3대 명당자리 중 하나’라는 것이다. 아직도 화산 바위 뒤편에는 부처상을 새긴 마애삼존불상이 그대로 남아있고, 성당 측은 간판에 이를 소개하고 있다. 두 종교의 상징물이 같은 곳에 있는 것도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조화의 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바위성당의 너른 바위는 대단한 종교 명당 터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응험함이 매우 빠를 수 있다.

함라마을이 속세의 기운을 받는 곳이라면 나바위성당은 성스러운 기운을 받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속(聖俗)의 세상을 동시에 체험하는 여행이 바로 함라산 둘레길 코스다.

사진·글 익산=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