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의 힘’ 보여준 최재형 감사원장의 원전 감사

이태훈 기자

입력 2021-01-12 10:43 수정 2021-01-1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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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수소 검출 논란은 여권의 국면 전환 시도인듯

<사진공동취재단/장승윤>

지난해 4·15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여권은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180석에 육박하는 거여(巨與)의 힘을 바탕으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과 ‘기업 규제 3법’ 등 여권이 목표로 한 모든 쟁점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법을 매개로 한 국정운영에 있어서는 정권의 의도가 거의 100% 관철된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뜻대로 안 된 게 3가지 있었다. 감사원의 원전 감사와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를 통한 중도 퇴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부인에 대한 1심 법원의 엄벌이었다.

그 중에서도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조기 폐쇄된 월성 원전 1호기에 대한 감사원 감사는 다수의 힘에 기대어 독주하던 문재인 정부에 대해 의미 있는 법적 제동을 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년여 간의 감사를 거쳐 지난해 10월 발표된 원전 감사 결과에서는 현 정부의 탈원전 기조에 맞춰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이 월성 원전 1호기의 경제성을 의도적으로 낮게 조작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월성 원전 1호기는 당초 정부가 에너지 효율화 차원에서 7000억 원을 들여 설계수명을 2022년 11월까지 늘려놓았는데 현 정부 들어 2018년 6월 조기 폐쇄됐다.

감사원 감사에서 조기 폐쇄가 적절했는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고, 조기 폐쇄를 결정한 한국수력원자력 이사들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추진됐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탈원전 정책에 대해 헌법기관인 감사원이 감사를 통해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민주화 이후 축적된 견고한 ‘법치주의의 힘’을 보여준 사례로 인식되고 있다.

검찰 수사로 이어진 원전 감사는 새해 들어 월성 원전 부지 지하수의 ‘삼중수소’ 검출 논란으로 다시 정치적 공방의 중심에 서고 있다. 한 지역 방송사의 삼중수소 검출 보도 이후 여당은 노후화에 따른 원전 폐쇄가 불가피했다는 점이 확인됐다고 주장하면서 조기 폐쇄 타당성과 경제성 평가에 초점을 맞춘 감사원 감사의 방향이 잘못 설정된 것이라고 공세를 펴고 있다. 월성 원전의 초점을 ‘경제성과 조기 폐쇄 타당성’에서 ‘안전 이슈’로 전환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하지만 감사원이 원전 조기 폐쇄 타당성과 경제성 평가에 초점을 맞춘 것은 2019년 국회가 의결한 감사 요구 내용에 따른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여당도 잘 인식하고 있었으며 감사원 감사 과정에서는 한 번도 문제를 삼지 않다가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휘하는 검찰 수사까지 이어지며 수세에 몰리자 국면 전환을 시도하는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최재형 감사원장은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원전 감사가 ‘경제성 조작 확인’이라는 정도까지 결과가 나오도록 정치적 외풍과 과감히 맞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원전 감사를 못 마땅하게 여긴 청와대 등 여권 핵심부와 갈등을 겪으면서도 감사가 중단되지 않고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감사원 수장으로서 중심을 잡았다는 것이다.

1956년 경남 진해 출신으로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거쳐 사법시험 23회에 합격해 판사가 된 최 원장은 당초 임명될 때만 해도 친정부 인사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4대강 사업’과 ‘방산비리’ 등 감사원에 부여된 적폐 청산 작업을 잘 이끌어줄 적임자로 판단하고 2017년 12월 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쇄 과정에 대한 감사에 착수한 이후에는 여권의 압력과 공세에 맞서면서 정권과 각을 세우는 강단과 소신을 발휘했다. 최 원장이 감사원 내부 회의에서 직원들에게 “외부의 압력이나 회유에 순치된 감사원은 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 “검은 것은 검다고, 흰 것은 희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독려한 것에서 진실과 정의에 대한 그의 열정이 묻어난다.

최 원장은 판사 시절부터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하는 곧은 판사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러면서도 약자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최 원장이 경기고 재학 시절 다리가 불편한 친구를 업어 매일 등하교를 시킨 일화는 그의 순수한 마음을 잘 보여준다. 최 원장은 수술 후유증으로 1년 늦게 경기고에 입학한 중학교 친구의 등하교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도왔다.

두 사람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고, 1981년 나란히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최 원장은 사법연수원을 다닌 2년 동안에도 이 친구를 업고 출퇴근을 도왔다. 두 사람과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노무현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강금실 변호사는 최 후보자가 임명될 당시 페이스북에 “사법연수원 한 반 이었어요. 말씀이 없으시고, 조용히, 드러내지 않고, 선의 가치와 공공의 이익을 위한 윤리의 실천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한결같이 해내며 곧을 길을 걸어가시는 분. 인격과 삶이 일치되는 분”이라고 글을 남겼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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