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된 패션계 거장 ‘피에르 가르뎅’…“고무신, 어쩌면 이렇게 예쁠까”

뉴스1

입력 2020-12-30 11:28 수정 2020-12-3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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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렇게 예쁠까? 베니스의 곤돌라를 닮았다”

지난 1978년 한국을 방문했던 피에르 가르뎅이 ‘고무신’을 보며 한 말이다. 그는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부부의 초대로 지금의 에버랜드(前 용인자연농원) 한옥을 방문했다. 당시 신들린 사람처럼 맨발로 내려가 홍라희 여사의 고무신을 집어든 일화는 유명하다. 곤돌라는 베니스의 수로를 따라 운행하는 배를 말한다.

지난 29일(현지시간) 패션계의 전설인 프랑스의 세계적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피에르 가르뎅 유가족은 이날 성명을 통해 그가 98세 나이로 숨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피에르 가르뎅은 방한 당시 놀이공원 내 물놀이 열차인 ‘후룸라이드’를 이 회장 부부와 함께 탑승하기도 했다.

한국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피에르 가르뎅은 이듬해인 1979년 로열티 사용료를 받고 브랜드명을 빌려주는 ‘라이선스 브랜드’로 한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양말이나 펜·우산은 물론 생수 등 다양한 상품에 그의 이름이 붙기 시작하며 대중들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피에르 가르뎅은 1922년 패션의 본고장이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에서 태어났다. 2살이 되던 해 가족들은 프랑스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떡잎부터 남달랐다. 건축가가 되길 바랬던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14살이란 어린 나이에 바늘과 실을 처음으로 잡으며 패션계에 들어섰다.

서서히 재능을 드러낸 그는 1947년부터 크리스찬 디올에서 3년간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디올은 ”함께 일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지만 거절한 일화도 유명하다.

결국 크리스찬 디올에서 나온 그는 1950년 자신의 이름을 딴 부티크를 열었다. 1958년에는 최초로 누구나 입을 수 있는 ‘기성복 라인’을 내놨다. 패션계에선 파격적인 시도였다. 이후 다양한 상품의 피에르 가르뎅이라는 상표를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라이선스 브랜드의 원조격인 셈이다.

물론 그의 인생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 파리 프렝탕에 기성복 라인을 처음 들인 그는 파리의상조합에서 퇴출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959년 일본 시장 진출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누구보다 빨리 동양 패션계에 관심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는 이유다. 1979년엔 서방 디자이너로 최초로 중국 베이징에서 패션쇼를 연 디자이너라는 타이틀도 거머쥐었다. 1986년엔 구소련에 기성복 라인을 선보이며 꾸준히 패션계에 영향을 미쳤다.

다만 전 세계적으로 피에르 가르뎅이란 브랜드를 키우고 라이선스 사업을 확장하면서 브랜드 가치가 서서히 하락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21세기 들어서도 패션을 향한 그의 열정은 멈출 줄 몰랐다. 2012년 아흔을 넘어선 나이에도 패션쇼를 열어 패션계를 놀라게 했다. 더욱 놀라운 건 그가 선보인 의상이었다. 비닐 소재 레인코트 등 미래 지향적인 의상을 선보이며 패션계를 다시 놀라게 했다.

이처럼 그가 두 세기에 걸쳐 패션계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기성복을 대중화한 주인공이며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를 비롯한 전 세계 유명인사로부터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인물이다. 동양 패션계에도 일찌감치 영향을 미쳤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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