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책 보장도 없는데… 어떤 공무원이 백신 선구매 나섰겠나”

전주영 기자 , 강동웅 기자 , 박효목 기자

입력 2020-12-24 03:00 수정 2020-12-24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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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백신]한국은 왜 백신확보 뒤처졌나
신종플루-메르스때 징계 트라우마… 골든타임 지난 지난달에야 “면책”
정부, 연내 백신접종 안될거라 봐… 되레 “일부 선진국 사재기” 비판
방역과신… 3차 대유행 경고 무시, 백신 공급 늦어지며 불안감 확산


대형 ‘백신 냉장고’ 앞에서 인터뷰하는 佛보건장관 올리비에 베랑 프랑스 보건장관이 22일(현지 시간) 파리 근교의 한 백신 물류센터에서 코로나19 백신에 관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프랑스는 27일부터 미국 화이자와 독일 바이오엔테크가 공동 개발한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시작한다. 영하 70도의 극저온 보관 및 유통이 필요한 화이자 백신의 특성을 반영하듯 베랑 장관 뒤로 대형 냉장고들이 가득한 모습이 보인다. 파리=AP 뉴시스
2009년 8월 신종인플루엔자(신종플루)가 걷잡을 수 없이 유행하자 당시 질병관리본부장인 이종구 서울대 의대 교수가 직접 벨기에로 떠났다. 그는 글로벌 제약사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본사를 찾아 “백신 300만 명분을 달라”고 요청했다. 뒤늦게 백신을 구하러 간 이 교수를 향해 국내에선 “구걸하러 갔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조건이 맞지 않아 백신 확보에 실패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국내 제약사인 녹십자가 백신을 개발했다. 정부는 2500만 회분을 확보했다. 다행히 유행이 조금 안정돼 백신 700만 회분이 남았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이 교수 등 방역당국 관계자들은 국정감사에서 ‘수요 예측 실패’를 이유로 질타를 받았다. 당시 백신 구매에 관여했던 한 정부 관계자는 “백신이 부족한 것이 더 큰 문제인데 오히려 남았다고 징계하면 어느 공무원이 열심히 하겠느냐”고 말했다.


○ ‘징계 트라우마’ 지울 면책 결정 늦었다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때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2015년 5월부터 2017년 9월까지 확진자 186명, 사망자 39명이 나왔다. 당시 정은경 질병관리본부 질병예방센터장(현 질병관리청장)은 최종 감봉 1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이유는 ‘초동 대응 잘못’이었다. 천은미 이대목동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새로운 감염병 때마다 공무원을 문책했던 과거 탓에 트라우마가 생겼고, 이번에도 백신 선구매에 누구도 앞장서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 백신 확보를 둘러싼 공무원 면책 결정도 늦어졌다. 여권 관계자는 “11월 23일 질병관리청이 감사원에 면책 문의를 했고 27일 ‘문제없다’는 취지의 답변을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11월 말은 이미 백신 확보의 골든타임을 놓친 시기로 공무원들이 백신 구매를 위한 적극 행정에 나서기 어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11월 백신도입자문위 회의에 참석했던 한 위원은 “보건복지부, 질병청 등 공무원들이 물밑에서 해외 백신 개발 업체들과 많이 접촉을 했다”며 “결정권이나 재량권이 없으니 계약 체결까지 속도감 있게 못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어떤 공무원이 백신 확보를 하기 싫어서 안 했겠냐”며 “일선 공무원이 코로나19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백신 개발 성공이 보장도 안 된 회사에 거액의 예산을 들여 선구매를 하겠다고 결정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청와대에서 선제적으로 백신 구매 공무원들에게 면책특권을 줬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 백신 개발 전망을 오판했다


복지부는 7월 SK바이오사이언스, 아스트라제네카와 3자 협약을 맺었다. 하지만 이후 다른 다국적 제약회사와의 협약은 없었다. 당시 복지부 고위 관계자 사이에서도 “백신 나와도 난 먼저 안 맞을 거다. 급할 게 없다”는 얘기가 나왔다. “SK바이오사이언스 안동 공장에 백신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며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여름부터 미국, 유럽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백신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부는 뒷짐을 지고 있었다. 8월 1일 권준욱 중앙방역대책본부 부본부장은 “일부 선진국의 사재기 현상을 보면서 진정한 국제적인 지도력이 매우 아쉬운 순간”이라며 “인류애가 필요한 시기”라고 오히려 훈수를 놨다. 다만 국내 전문가들도 연내에 접종이 가능한 백신이 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빨리 백신이 개발됐다.

김우주 고려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연초에는 백신 불확실성이 있었지만 유력 제약사들의 임상 중간 결과가 나온 6, 7월에 빨리 분산 투자로 전략을 바꿨어야 했다”며 “없어서 못 맞는 것과 있는데 안 맞는 것은 다르다”고 말했다.


○ K방역만 믿고 3차 유행 준비 미흡했다


2차 유행이 끝나자 전문가들은 ‘3차 유행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백신 없는 겨울을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정부는 병상 확보, 의료진 확충 등 모든 면에서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3차 유행이 본격화하면서 이달 하루 1000명 안팎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다. 병상이 부족해 입원하지 못하는 확진자가 600명에 육박하는 날도 있었다.

의료계와의 협력도 틀어져 가뜩이나 모자란 인력 상황이 악화됐다. 의정 갈등의 여파로 의대생 2700여 명이 올해 의사 국가고시 실기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코로나19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의료 인력이 사라졌다.

3차 유행을 막았다면 백신 공급 지연에 대한 불안감도 크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K방역을 지나치게 과신한 탓에 백신 확보도, 3차 유행 차단도 실패한 것이다. 정기석 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전 질병관리본부장)는 “정부가 3차 유행을 준비하지 않아 아까운 생명들이 사망했다”며 “의료계와 협력하고 전문가들의 조언을 귀담아들어 방역정책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주영 aimhigh@donga.com·강동웅·박효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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