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내 토양… 돌아왔다는 표현은 맞지 않아요”

김기윤 기자

입력 2020-12-10 03:00:00 수정 2020-12-10 05: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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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신스틸러’서 ‘햄릿’으로 무대 서는 배우 이봉련
‘삼진그룹…’ ‘옥자’등서 강한 존재감, 필요한 만큼 캐릭터 절묘하게 표현
2005년 뮤지컬로 데뷔한 이래 장시간 무대 비운적 없어
이번엔 ‘여성 햄릿’으로 변신 “정의-진실… 올해도 통할 지점”


이봉련은 학창 시절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를 꿈꿨다. 그는 “사진작가와 배우는 인간 군상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닮았다”며 “요즘은 연기가 좋아 죽을 것 같다가도 지긋지긋해지는 순간도 있다”며 웃었다. 국립극단 제공
당신은 분명 배우 이봉련(39)을 본 적이 있다. ‘어디서였지….’ 고민도 잠시. 영화나 TV 속 프레임 안의 그를 본 순간 “아, 이 사람!” 탄성과 함께 강렬한 존재감이 떠오른다.

최근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는 임신했다고 퇴사를 권고받은 미스 김, ‘버닝’에서는 사라진 해미의 친언니, ‘옥자’에서는 안내데스크에 앉아 “전화로 하세요, 전화”라고 무심하게 대사를 내뱉고 ‘82년생 김지영’에서는 주인공을 물심양면 돕는 동료 혜수까지. 모두 이봉련이다. 조연으로 잠깐 등장하지만 딱 필요한 만큼 탁월하게 캐릭터를 표현하기에 프레임 밖 모습은 오히려 낯설다.

배우 이봉련이 국립극단의 신작 연극 ‘햄릿’으로 돌아왔다. 복수의 칼을 갈며 광기를 뿜어내는 ‘햄릿 공주’ 역이다. 8일 화상으로 만난 그는 “무대에 돌아왔다는 표현은 맞지 않다”고 했다. “한 번도 여기(연극)를 벗어나서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돌아온 것도 아니고, 그냥 쭉 하던 일입니다. 무대는 제 토양이에요.”


스크린으로 인지도를 높였지만 스물넷이던 2005년 뮤지컬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로 데뷔한 이래 무대를 오래 비우지 않았다. 박근형 연출가의 극단 골목길 출신으로 ‘극장서 나고 자랐다’. 배역의 연령대나 장르 폭이 넓어 ‘나이아가라 폭포 수준’이란 평을 들을 정도로 그의 연기는 다채롭다. 슬픈 미소를 띠며 인생을 관조하는 듯한 시선을 보이다가도 극단으로 치달을 때 동공의 1mm 흔들림도 없이 처연하게 좌절을 표현한다.

그는 “배우 홍수의 시대, 관객과 연출자들이 제 연기가 ‘흥미롭다’며 좋아하시는데, 습관처럼 매일 ‘그 연기’를 꺼내는 저 자신에게 좀 질릴 때가 있다”며 “관객이 질리지 않도록 작품에 잠깐씩만 나오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웃었다.

이봉련 배우가 맡은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총무부 미스 김(위 사진)과 ‘82년생 김지영’의 혜수. 이 배우는 “무대든 매체든 모두 배우로서의 일이기 때문에 그 경계를 없애고 싶다”고 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번 연극에서는 또 한 번 변신한다. 성에 갇힌 ‘고뇌자 햄릿’이 아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복수자 햄릿’으로 135분을 채운다. 그는 “중세 유럽 왕정시대에 벌어질 법한 얘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한국의 정의, 진실, 세대갈등, 인간의 나약함을 조명한다. 그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2020년에도 통할 지점이 있다”고 말했다.

70년 역사 국립극단의 2001년, 2007년에 이은 세 번째 햄릿이다. 부새롬 연출, 정진새 작가가 의기투합했다. 여성 햄릿은 그가 처음이다. 그는 “젠더프리 캐스팅이나 단순한 ‘여성 서사’가 아니어서 좋았다”며 “성별이 바뀌어도 이야기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햄릿은 여성보다 인간이기에 하는 고민이 더 많다”고 했다.

아버지 죽음의 배경을 밝혀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햄릿 공주에게 무대 밖은 더 전쟁 같다. 개막은 한 차례 밀려 17일 예정이었으나 사회적 거리 두기 강화로 이마저도 잠정 연기됐다. 19일 개막도 불투명해 온라인 공연도 고려한다. 그는 “‘연습하면 공연도 한다’는 전제를 의심한 적이 없다. 꼭 관객과 만나길 바란다”고 했다.

그의 내공은 이미 업계 너머로 퍼졌다. 봉준호 감독은 과거 인터뷰에서 그를 ‘가장 주목하는 연극배우’로 꼽았다. 함께 무대에 서던 ‘기생충’의 이정은 배우는 “봉련이는 잠깐 등장해도 ‘기승전결’을 다 보여주는 것 같다”고 했다.

팬들이 ‘연기 천재’라는 별명으로 부른다고 하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어휴, 부담스러워요. 천재에겐 뭘 자꾸 기대하잖아요. 제 본명은 이정은인데 검색하다 마음에 들어 ‘이봉련’을 예명으로 했어요. 이름 자체가 별명 같지 않나요?”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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