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선교 밀알, 흔적 찾아… ‘문준경 순례길’ 발길 이어져

신안=김갑식 문화전문기자

입력 2020-11-23 03:00 수정 2020-11-2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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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때 고향 신안군서 전도사 활동
“한해 신발 9켤레 닳을 정도로 열정… 지역 개신교 비율 90%에 큰 영향”
6·25전쟁중 좌익세력에 의해 ‘순교’, 2013년 기념관 건립… 순례길도 조성
코로나 前엔 하루 1500여명 참배객


문준경 전도사를 추모하고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2013년 세워진 전남 신안군 증도면의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전경과 생전의 문 전도사(작은 사진).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제공
전남 신안군 증도면 우전리 바닷가에서는 한국 기독교(개신교)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지닌 인물을 만날 수 있다. 19일 찾은 이곳에는 ‘섬 선교의 어머니’로 불리는 문준경 전도사(1891∼1950)의 묘와 순교지 비가 있다.

17세 때 결혼했지만 가정적인 어려움을 겪은 문준경은 1936년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을 졸업한 뒤 고향인 신안군에서 전도사로 활동한다. 그는 군내 14개 읍면을 돌며 18년 동안 임자진리 증동리 대초리 교회 등 3개의 교회와 재원리 방축리 우전리 등 3곳에 기도처를 설립했다. 이곳들이 이후 신안군 일대에 들어서는 100여 개 교회의 밀알이 됐다. 6·25전쟁 당시 전남 목포에 있던 그는 신자들을 돌봐야 한다며 신안으로 돌아왔는데, 좌익세력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날 순교지를 둘러보던 우전리교회 박성균 목사(61)는 “감시가 심해 8일 만에 시신을 수습한 것으로 전해진다”며 “순교지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성도(신자)들과 함께하려고 했던 문 전도사의 삶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문준경은 돛단배와 징검다리처럼 돌을 놓아 바닷물이 빠질 때 섬 사이를 오갈 수 있는 ‘노두길’을 이용해 한 해에 고무신 아홉 켤레가 닳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전도했다. 일제강점기에 더구나 보수적인 섬 분위기에서 여성이 전도사로 활동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국내 종교 지형도를 흔히 말할 때 ‘영남은 불교, 호남은 개신교’라고 하지만 신안군의 개신교 강세는 두드러진다. 신안 토박이인 방축리교회 고영달 목사(52)는 “신안군에서는 작고한 김준곤 이만신 목사 등 159명의 목회자가 배출됐고, 주민 중 신자 비율이 한때 90%에 달했을 정도로 전국 지자체 중 가장 높다”며 “높은 복음화 비율에는 문준경 전도사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이 교회 박문섭 장로(70)는 “문 전도사는 단순히 선교만 한 게 아니었다. 당시에는 주변 섬들과의 왕래가 어려웠다. 그는 소식을 전하는 집배원이자 약을 전하는 약사, 심지어 출산을 돕는 산파였다”고 말했다.

문준경의 삶은 지역과 소속 교단인 기독교대한성결교회(성결교)를 중심으로 알려지다 2005년 순교지 조성을 계기로 활발하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2013년 건립된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은 신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고, 최근에는 기념관을 중심으로 순례길이 조성되기도 했다.

19일 문 전도사 순교지를 찾은 증도면 방축리교회 고영달 목사(사진 왼쪽)와 우전리교회 박성균 목사. 신안=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이날 찾은 기념관은 3층 건물로 바깥에는 대형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건물 입구에는 그의 삶을 상징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장 24절)

부산에서 가족과 온 한 참배객은 “문준경 전도사가 ‘신앙의 어머니’로 불리는 것을 알고 있다”며 “신안 주변과 함께 문 전도사 삶의 흔적을 살펴보고 싶었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전에는 하루 1500여 명의 참배객이 몰렸다는 게 기념관 측 설명이다.

두 목회자는 “이곳은 50, 60대가 청년 대우를 받을 정도로 고령화돼 선교 활동이 어려워졌다고 하지만 문 전도사가 활동했던 시기만큼 힘들지는 않다. 그분의 하나님 사랑, 영혼 사랑을 본받아 새로운 부흥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신안=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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