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는 손이 아닌 눈으로…” 그들은 왜 누드크로키를 그리나[전승훈 기자의 디자인&콜라보]

전승훈 기자

입력 2020-11-20 14:00 수정 2020-11-21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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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몽파르나스 인근에는 유서깊은 누드크로키 아카데미 ‘그랑 쇼미에르’가 있다. 모딜리아니, 마르크 샤갈, 쟈코메티, 후안 미로와 같은 유명 화가도 다녔던 곳이다. 5년 전 쯤 파리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친분이 있던 화가로부터 자신이 다니는 누드크로키 강좌에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참가비는 단돈 5유로(당시 약 7500원). 학창시절 미술시간 이후로 한번도 그림을 그려본 일이 없던 터라 자신이 없었고, 바쁜 업무에 치여 결국 가보지 못했다.

올해 5월초. 메일함을 열어보니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갤러리 토포하우스에서 누드크로키 아카데미 강좌가 열린다는 보도자료가 있었다. 파리에서 한차례 기회를 놓친 아쉬움이 가슴 속 한켠에 남아 있던 것일까. 메일을 받자마자 갤러리 측에 전화를 걸었다. “저 이거 배우고 싶은데요!”
파리의 누드크로키 아카데미 ‘그랑 쇼미에르’



●‘선을 탐구하는 예술’ 크로키


매주 목요일 퇴근 후 7시에 인사동을 찾았다. 수강생들의 직업과 연령대는 다양했다. 현직 화가와 미대 교수부터 패션디자이너, 산업디자인과 교수, 사진작가, 필라테스 강사, 80대 제약회사 회장, IT기업 회사원, 공무원….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인체드로잉에 심취해 있었다. 그들은 도대체 왜 크로키를 하는 것일까.
토포하우스 누드 크로키 강좌


10여 명의 수강생들이 이젤을 놓고 둥그렇게 앉아 있다. 가운데 있는 모델의 동작을 그리는 데 주어진 시간은 3분. 곧바로 새로운 포즈로 바꾸기 때문에 눈과 손을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했다. 3분에 그린 나의 첫 그림은 겨우 얼굴 부분에 동그라미 하나 정도 밖에 그리지 못했다. 그리는 사람은 아마추어지만, 모델은 프로였다.

모델은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준비해온 음악을 틀었다. 클래식부터 가요, 팝송과 샹송까지…. 잔잔하고 아름답고, 때로는 슬픈 음악은 그리는 사람과 모델사이의 어색한 공간을 채워주었다. 모델협회에서 보내오는 모델은 매일 바뀌었다. 무용수 출신의 한 모델은 등을 활처럼 휘고, 온몸을 비트는 아크로바틱한 동작을 이어가다가, 마지막엔 기다란 막대 소품을 들고 자신의 배를 찌르는 듯한 비극적인 몸짓으로 마무리지었다. 비록 정지된 동작이었지만 마치 한 편의 현대무용을 본 듯한 퍼포먼스였다. 그 움직임을 제대로 화폭에 담지 못하는 내 실력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남성 모델은 또다른 매력이 있었다. 탄탄한 근육이 다져진 몸을 스케치할 때는 ‘내가 살아있는 다비드상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토포하우스 누드크로키 아카데미 수업


6개월 정도 꾸준히 누드크로키를 연습하면서 크로키란 ‘선의 예술’이라는 걸 느꼈다. 인체에는 수많은 선(線)이 있다. 마른 모델에게는 마치 해부학 교과서를 보는 듯 울퉁불퉁한 뼈가 선명하게 보였다. 등뼈와 쇄골, 고관절, 갈비뼈, 치골…. 반면 풍만한 체형의 모델은 부드러운 곡선의 향연이다. 그러나 3분 안에 이 모든 선을 다 그릴 수는 없다. 화가는 그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살아 움직이는 모델의 퍼포먼스에서 내 감정을 뒤흔든 선을 탐구하고 기록하다보면, 어느덧 그림에서도 역동적인 움직임이 느껴지게 마련이다.
전승훈 기자의 누드 크로키 작품

또한 크로키는 명상을 하듯 고도의 집중을 하는 ‘선(禪)’ 수련과 비슷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3분마다 바뀌는 자세를 정신없이 스케치하다보면 어느 샌가 2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수강생인 채승진 연세대 산업디자인과 교수는 “공부를 할 때 3분을 하더라도 몰입하는 경우와 2시간 공부해도 딴 생각을 한 사람은 차이가 많이 나게 마련”이라며 “크로키 할 때의 ‘몰입효과’가 머릿 속의 잡생각을 비워줘 정신건강에도 좋다”고 말했다.

채 교수는 “디자이너를 포함해 조형예술을 하는 사람은 관찰력과 정확한 표현력이 필요한데, 누드크로키 만큼 좋은 연습은 없다”고 말한다. 그의 인체 드로잉에서는 뼈대나 구조, 해부학에 기초한 탄탄한 조형물 같은 느낌이 든다. 채 교수는 “매주 모델이 바뀌는데다 동작도 시시각각 변화하기 때문에 누드 크로키는 디자이너로서 자기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늘 새로운 도전”이라고 말했다.

채승진 교수의 누드 크로키


동구바이오제약 이경옥 회장(82)은 수강생 중 최고령이다. 2년 전 팔순의 나이에 누드 크로키를 처음 시작했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인 이 회장은 요즘 누드크로키 외에도 도시풍경을 펜과 수채물감으로 묘사하는 어반스케치도 배우고 있다.

“이 나이에 누드크로키를 배우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감사하고 행복한 일입니다. 나이 들어서 새로운 것을 해보는 것은 내 삶을 더 도전적으로 위를 바라보게 합니다. 취미활동은 한가하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느슨할 때보다 오히려 바빠야 내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체크하고, 빠르게 움직이게 됩니다.”


●나는 왜 크로키를 그리는가


백범영 용인대 동양화과 교수는 소나무 그림과 산수화로 유명한 화가. 대부분 수강생들이 연필과 목탄으로 누드 크로키를 그리는 반면, 먹물을 묻힌 붓으로 과감하게 인체를 표현하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화가는 손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눈으로 그려야합니다. 관찰에서 ‘관(觀)’은 넓게 보는 것이고, ‘찰(察)’은 세세하게 보는 것입니다. 인체 드로잉은 먼저 크게 골격을 보고, 세심하게 조목조목 그려야 하죠. 이 방법은 음식을 요리하는 법, 기업체 경영에도 다 적용돼요. 그림을 그려보면 세상의 이치도 알게 되는 법이죠.”
백범영 교수의 누드 크로키


백 교수는 “서양화든 동양화든 회화는 같은 것”이라며 “화가에게 드로잉은 ‘밥’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약처럼 특별할 때 먹는 것이 아니라 밥먹는 것처럼 매일 훈련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불교미술과 서양화를 접목시키는 작업을 하는 장용주 화백도 “동양화를 하는 사람은 매일 사군자를 그리듯이, 서양화의 기본인 데생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크로키가 필수”라고 말했다.
장용주 화백의 누드 크로키


필라테스 강사 샤샤정(오산대 건강재활 겸임교수)은 2000년도부터 헬스클럽 퍼스널트레이닝(PT)에 필라테스를 접목해 대중화시킨 주인공이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샤샤필라테스는 아나운서 최은경, 이정민과 배우 남규리 안선영 등 수많은 유명 연예인들의 몸을 관리해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대학원에서 스포츠의과학을 전공하면서 몸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그는 6년 전부터 누드크로키를 시작해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가 필라테스 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아크릴화도 센터 곳곳에 걸려있기도 하다.

“사람들의 몸에 관심이 생기면서 인체드로잉은 몸을 연구하는 데 좋은 도구이기도 합니다. 모델의 동작을 보면서 근육과 뼈의 움직임을 봅니다. 모델이 몸에 힘을 줘 근육을 수축시킨채 3분 동안 버티는 동작은 엄청나게 고난이도의 ‘등척성(等尺性) 운동’이예요. 2시간 동안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가 제 삶의 힐링타임이기도 합니다.”
샤샤정의 누드 크로키

샤샤정의 필라테스 하는 사람들 아크릴화



패션브랜드 ‘데무(DEMOO)’를 이끌고 있는 디자이너 박춘무 씨는 2018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데뷔 30주년 기념전시회에서 자신이 그동안 만들어 온 의상을 전시하면서, 한쪽 벽에는 자신이 그려 온 누드크로키 100여 점을 빼곡히 전시했다. 특유의 무채색의 아름다움을 펼치는 그의 의상과 텍스타일 디자인도 인기가 높았지만, 아름다운 누드크로키 그림 앞에서 인증샷을 찍는 관람객들이 쇄도했다고 한다. 박 씨는 “패션디자인은 결국 사람의 몸에 옷을 입히는 일을 하는 것”이라며 “인체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누드 크로키를 10년이 넘도록 꾸준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디자이너 박춘무의 누드크로키


이달 초에는 인사동 갤러리 토포하우스에서 누드크로키 아카데미 수강생들의 그룹 전시회가 열렸다. 똑같은 모델을 보고 그렸는데도, 각자의 직업이나 성격에 따라 개성있는 선으로 표현해낸 인체 드로잉은 비교감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1주일에 한번 하는 누드 크로키 아카데미의 수강료는 4개월에 40만원. 한달에 10만원 꼴인셈. 평생 기자로서 다른 예술가를 취재하고, 비평하는 일만 해왔던 내가 그림을 그리고, 그 작품이 갤러리에 걸리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누드 크로키 강좌를 지도하는 이은규 화백은 “그림은 ‘그리움’에서 태어난 것”이라며 “동굴벽화에서 누군가 그리운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 가장 간단한 도구로 이미지를 남긴 것이 크로키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이 화백은 자신의 크로키 화집인 ‘이은규 Nude Croquis’ 서문에 이런 글을 남겼다.

“사람의 모습도 우주의 역사만큼이나 무궁무진하다.

숨이 차 오를 때 벌떡이는 뱃골은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고

근육과 피부는 뼈의 움직임에 따라 파도처럼 튀어오르며

뭉치고 뒤틀리며 맺히고 풀어지고 흐르면서 사라진다.

지상에서 오직 사람만이 내딛는 발은 대지를 할퀴듯 발가락을 꼬부리고

꼬부린 발가락은 신경줄이 팽팽하다.

곧게 뻗은 허벅지는 세상을 헤쳐나갈 꿋꿋한 버팀목이요,

자유로운 팔과 손은 공간을 휘젓고 조그만 눈은 먼 곳을 응시힌다.

봉긋이 솟아오른 가슴은 풍요로운 사랑이며

자연스럽게 흐르는 유연한 선은 벌판을 휘감고 도는 강줄기 같고

부드러운 허리선과 골반을 싸안은 엉덩이는 생명 그 자체이다.”
김나미 작가의 누드 크로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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