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기 똘기 끈기…” VC대표가 말하는 투자하고 싶은 창업자[신무경의 Let IT Go]

신무경기자

입력 2020-11-12 12:00 수정 2020-11-12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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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람 임정욱 TBT 공동대표 인터뷰
권오현 황각규 등도 고문으로 참여해
스타트업 도움 받아 위기 극복 사례도
아모레퍼시픽 추가 펀딩 조성 준비 중


“잠깐 그 밑에서 기다려주시겠어요?”

3일 오전 10시 20분쯤.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 소재 벤처캐피털(VC) TBT 사무실에 들어서자 허공에서 임정욱 공동대표의 인사말이 들렸다. 고개를 올려다보니 복층 공간 사이로 임 대표의 고개가 보였다. 보기 드문 복층 사무실이었다. “두 대표 자리는 위에 있어요.” 계단을 내려와 ‘새로운’ 명함을 건네며 임 공동대표가 말했다.

임 대표는 2013년부터 스타트업 생태계의 교류를 활성화하고자 만들어진 스타트업얼라이언스의 초대 센터장을 맡은 바 있다. 센터장을 그만둔 지는 8개월 여 지났지만 여전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국내외 정보기술(IT) 업계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소개하고 있어 ‘스타트업 전도사’로서의 영향력은 그대로다. 달라진 게 있다면 평소와 달리 눈이 충혈 돼 보였다는 점.

약속 시간에 10여 분 일찍 도착한지라 이람 공동대표는 도착 전이었다. “이 대표께서 곧 도착하신다고 하네요. 어제 새벽 3시나 되어서 집에 들어와서….” 임 대표가 말했다. TBT 회식자리가 있었나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투자를 검토 중인 스타트업 현장 방문 때문에 늦게 퇴근했어요. 동대문 기반으로 활동하는 스타트업이죠. 투자 전에는 현장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동대문이다 보니 시장이 열리는 새벽에 가야만 했어요.” 두 대표와 직원 2명이 새벽에 동대문 실사를 다녀왔다고 했다. 임 대표 눈이 빨갰던 이유다.

“딱 맞춰왔네요.”

시간 맞춰 이 대표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건네 준 명함에는 ‘창업자’라 쓰여 있었다. TBT 설립으로 회사 창업은 처음이지만 그는 ‘사실상 창업자’로 불린다. 싸이월드, 네이버 카페와 블로그, 밴드, 스노우까지….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각종 서비스들이 이 대표 손에서 나와 업계에서는 그를 ‘스타 기획자’라 부른다.

“거울 잠시 보고 와도 될까요?” 이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사무실에 도착해 숨도 돌리기도 전에 카메라부터 들이댔던 실례를 범한 듯하다.

―오늘 새벽에 동대문을 다녀오셨다고요.

▽임정욱 공동대표(이하 임)=동대문에서 물건을 대신 사주는 ‘사입 삼촌’(사입 근로자를 일컫는 말)들이 디지털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돕는 스타트업의 사업을 좀 더 알아 보려구요. 사입 하시는 분들의 일하는 방식이 전국 각지의 소매업자들로부터 온 주문 내역을 쪽지에 담아 들고 다니며 도매상에서 물건을 뗀 뒤 보내주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는데요. 이제는 그 종이 대신 앱 하나로 처리되는 세상이 온 거죠.

임 대표는 맥북을 열어 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동대문 주요 상가 곳곳에서 사입 근로자들이 일하는 현장을 담고 있었다. 몇 시간 전인 이날 새벽에 다녀왔다고 했는데 사진을 그새 노트북에 다 옮긴 것 같다.


▽이람 창업자(이하 이)=
자정부터 사입 삼촌들 뒤를 졸쫄 쫓아다녔어요. 책상에서 이 사업을 들었을 때는 이 서비스를 통해 ‘동대문 사입 삼촌들이 다 없어지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현장을 가보니 그 가설은 틀렸더라고요. 물리적인 주문이 들어오면 주문을 받아서 뿌려줘야 하는데 이런 동대문의 핏줄 같은 분들의 일자리는 디지털이 아무리 빠르게 침투한다 해도 쉽사리 대체되기는 쉽지 않겠더라고요.


―평소에도 투자 전 현장을 방문하시는 편인가요?

▽이=통상 스타트업이 만든 앱을 많이 써보는 편이에요. 한 스타트업의 앱은 200번 정도 써본 거 같아요. 결제도 직접 해보고요. 앱을 쓴 이용자들에 대한 실사도 하죠. 이번 같은 경우는 기업 간 거래(B2B) 서비스다보니 현장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야 B2B 앱 유저인 사입 삼촌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현장 실사는 임 대표가 제안했다고 했다. 국내 VC들이 투자사 사무실을 주기적으로 찾는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새벽 실사를 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미 실리콘밸리 VC들은 현장에 가지도 않고 줌 화상회의만으로 투자 결정을 하는 경우도 종종 생기고 있다고 한다지만… 현장에 답이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TBT가 설립되고 최초 펀드를 설립할 때 네이버가 상당 금액을 펀딩했습니다. 네이버도 자체적으로 투자를 집행하고 여러 펀드를 운용 중입니다. TBT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이=2018년 네이버와 함께 TBT 글로벌성장 제1호 투자조합을 결성했죠. 1100억 원 규모였습니다. 네이버는 전 세계의 펀드들에 투자합니다. 저희는 그 중에서도 네이버 사업과 직접 연관되지 않은 스타트업에 투자합니다. 거의 모든 스타트업을 커버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상당 부분 소진한 상황입니다.

네이버의 추가 출자를 받아 새롭게 펀드를 운용할 계획이 있냐는 질문에 이 대표는 “펀드가 다 소진된 뒤 실적이 나와 이를 평가해보고 이후 다시 논의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 한다”고 말했다. 네이버에서 나온 지 오래지만 여전히 네이버에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최근 펀드를 새로 조성하셨다고 들었어요. 오픈이노베이션, 즉 대기업과 스타트업을 연결해주는 펀드인 것 같은데 규모와 목적은 무엇인가요.

▽임=최근 TBT 오픈이노베이션 투자조합을 결성했어요. 330억 원 규모입니다. 포스트코로나 펀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이 펀드를 통해 모토브, 모노랩스라는 스타트업에 투자를 했습니다. 모토브는 택시 상단 표시등에 스마트 미디어 기기를 설치해 도시 데이터를 수집하고 위치 기반 광고를 하는 서비스고요. 모노랩스는 인공지능(AI)이 건강식품을 추천해주고 이를 구독해 받아보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입니다.

―이 대표님은 왜 VC 창업을 하셨고, 임 대표님은 왜 VC에 합류하셨나요.

▽이=직접 만드는 것보다 좋은 창업자를 돕는 게 맞는 때라고 생각했어요. 기획자의 유효 기간, 피크는 지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계속 새로운 서비스를 만드는 동네에는 있고 싶었죠. 내가 대장으로 서비스를 만들진 않더라도 돈과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동네를 찾은 것이죠.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싸이월드는 20대에 만들었고, 20대 이용자들이 이용했어요. 카페와 블로그는 30대에 만들었는데 30대 유저들이 사용했고요. 40대에는 밴드를 만들었고 40대 사용자들이 들어왔죠. 그 때 느꼈어요. 밴드를 만들었을 때 이용자층이 20대, 30대로 잘 안 내려간다는 걸….

그 때 김창욱 현 스노우 대표를 찾아서 함께 아이템을 정하고 사람을 붙이고 펀딩을 했어요. 그렇게 나온 게 스노우에요. 그러니 20대 이용자들이 생기더라고요.

사업부장을 고르고 그 사람과 아이템을 정하고, 맞는 팀을 꾸려주고, 론칭 할 때까지 리뷰하고, 론칭 후에도 마케팅 예산을 챙기고… 그 과정을 보면서 VC가 나와 좀 더 맞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임=2012년 다음 임원으로 미 실리콘밸리에 가서 유한책임투자자(LP) 역할을 했어요. 현지 VC들을 보니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VC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죠. 개인적으로 현지에서 개인투자도 해봤고요. VC 생태계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한국에 돌아온 뒤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서 스타트업과 VC들을 만나는 다리 역할에 대한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자연히 이 대표님과 만나게 돼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뜻이 맞아 함께 하게 됐습니다.

TBT에 인터뷰를 요청한 건 네이버에서 성공 경험을 가진 창업자와 다음을 비롯해 스타트업 업계 빅마우스인 공동대표가 설립한 펀드라는 인지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삼성, SK, 롯데, 아모레퍼시픽 등 많은 대기업들의 오너와 경영진이 TBT를 찾아 스타트업 생태계와 관련한 이야기를 대거 주고받는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대기업들과 커뮤니케이션을 많이 하신다고 들었어요. 대기업은 스타트업 생태계에 어떤 궁금증을 갖고 있나요.

▽임=모든 분야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대기업들은 자신들의 업도 디지털, 비대면 쓰나미에 쓸려버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어요. 현장에서 어떤 스타트업이 나오고,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미리 스타트업에 투자를 하거나 협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고 있기도 하고요.

과거에는 대기업들이 ‘좋은 스타트업이 있겠냐’ 정도의 반응이었는데요. 이제는 화제가 되는 스타트업들이 많다보니 생각이 많이 바뀐 듯합니다.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기업들도 ‘과거에는 스타트업을 지원한다고 했는데 이제는 배워야 겠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죠.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가 오고가나요.

▽이=최근 한 대기업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발 치수를 측정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적합한 신발을 추천해주는 스타트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쪽 반응은 ‘우리와 크게 상관없는 회사’라 생각하시는 듯했어요. 그런데 해당 대기업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데이터 기반 취향 추천이라는 측면에서 스타트업에 배울 게 있다고 말씀드렸죠.

앞서 방문한 사입 삼촌들을 위한 플랫폼도 마찬가지에요. 일견 B2B 서비스로 보이지만 그 안에서 100% 현금으로 이뤄지는 부분들을 신용카드로 전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카드사들이 이런 점에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겠죠. 현장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펀드를 함께 조성한 투자사들의 눈높이에서 공유하고 있는 셈입니다.


―대기업과 스타트업 간 모더레이터 역할을 하시는 듯 한데요. 실제 TBT가 양 측 간 시너지를 내는 데 도움을 준 사례가 있을까요.

▽이=아모레퍼시픽과 저희 투자사인 라이브 커머스 플랫폼 그립을 예로 들고 싶어요. 아모레퍼시픽 브랜드인 아리따움의 가맹주들이 그립을 통해 생방송을 많이 하세요. 얼마 전가지만 해도 아리따움 매장은 화장품을 판매하기에 좋은 허브였어요. 그런데 코로나19 등 상황 변화로 소비자들이 온라인으로 옮겨갔어요. 자연히 오프라인 허브의 트래픽이 줄어들었죠.

이런 상황에서 저희가 아모레퍼시픽에 그립이라는 서비스에 대해 소개하고 조언을 드렸어요. 그 이후 아리따움 가맹주들이 많이 활용하기 시작해 이제는 하루에 온라인에서만 100만 원씩 매출을 내는 회사들이 생겨나고 있어요. 매출뿐만 아니라 가맹주들은 방송을 위해 제품 하나하나를 공부하면서 화장품에 대해 훨씬 잘 알게 되고요. 비록 매출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아모레퍼시픽 입장에서 광고 효과가 생겨나게 되기도 했죠.

▽임=서경배 회장님께서 TBT 사무실을 찾으셔서 라이브 커머스와 그립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보이시기도 했어요. 배우고 싶어 하시는 의지도 강하셨고요.

▽이=아모레퍼시픽이 기존에 펀드 출자에 참여했는데 해당 펀드는 네이버 중심이었어요. 향후에는 아모레퍼시픽이 주가 되는 펀드를 조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 황각규 전 롯데지주 부회장 등도 TBT를 찾아왔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연유인가요.

▽임=권 전 회장은 삼성전자에 계실 때부터 스타트업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저희 포트폴리오사들을 분기에 한 번 씩 만나 멘토링 해주고 계십니다. 황 전 부회장도 롯데에서 주최한 스타트업 데모데이 행사에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하고 계실 정도로 애정을 갖고 계십니다. 이 분들은 비공식 고문을 맡아주고 계십니다. SK수펙수추구협의회 서진우 위원장은 공식 고문을 맡아주고 계십니다.

대기업 최고 경영진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자연스레 대기업이 스타트업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 것 같습니다. 대기업들이 과거에 정부 주도하에 억지로 창업센터를 열었다면 이제는 이런 변화 속에서 스스로 관련 조직을 만드는 상황까지 온 것이죠.


―그 분들께서는 스타트업에 어떤 조언들을 해주나요.

▽이=작은 스타트업들이 커질 때, 국내에서 글로벌로 나아갈 때, 이른바 스케일업 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합니다. 대기업 최고 경영진 분들은 글로벌 사업을 하면서 확장을 해본 경험이 있어 이에 대한 조언을 해주시죠.


―그 정도 조언은 두 분께서도 하실 수 있을 거 같은데….

▽이=네이버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만드는 단계, 그리고 서비스를 키우는 단계를 경험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대기업 최고 경영진들이 말하는 스케일업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죠.

다만 저희는 창업자들에 좋은 토론 파트너가 되려고 해요. 사실 창업자들은 직원들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좋은 질문을 하는 데 대한 고민도 많아요.

▽임=창업자들은 자신들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항상 피드백을 갈구하는 사람들이에요. 한 창업가는 앱을 개발했지만 서비스 출시 1년 여 간 외부인을 위한 자료를 만든 적이 없더군요. 그저 앱 개발이 중요하다고만 믿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투자자 피드백을 받으면 좋을 것 같다고 얘기해줬어요. 해당 창업자가 ‘정신이 바짝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의외로 처음 창업하면 우리가 당연하게 보는 것들에 대해서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TBT는 앞으로 어떤 창업가에 투자하실 생각이신가요.

▽임=문제를 잘 찾아내고, 그 문제에 대해 유니크한 해결책을 낼 줄 아는 사람에 투자합니다. 학습 능력, 끈기, 호기심이 계속 발전하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이=총기, 똘끼, 끈기라고 봐요. 총기가 있는 사람이 관찰을 잘 하고, 문제를 잘 정의하죠. 똑똑하다고 다 창업을 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특이한 사람들이 하는 것 같고요. 왕관의 무게를 견딜 수도 있어야 하고요.

신무경기자 y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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