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 이익 극대화에서 ‘고객-사회와의 동행’으로… 자본주의의 전환[인사이드&인사이트]

김현수 기자 , 홍석호 기자

입력 2020-11-09 03:00 수정 2020-11-0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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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산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기업의 사회적책임은 이윤을 높이는 것이다.”

1970년 9월 13일, 세계적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이 같은 제목으로 한 시대의 획을 긋는 기고문을 뉴욕타임스에 실었다. 이는 향후 50년 동안 ‘기업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답으로 통했다. 바로 주주(shareholder)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미국식 ‘주주 자본주의’의 탄생을 알리는 글이었다.

50년 뒤인 2020년 9월 13일, 뉴욕타임스 매거진은 기고문 50주년을 맞아 흥미로운 기획을 했다. 저명한 경영자, 경제학자 등에게 ‘프리드먼의 생각에 동의하는지’를 물은 것이다.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마크 베니오프(세일스포스 창업자): “나는 프리드먼이 한 세대의 최고경영자(CEO)들을 세뇌했다고 생각한다. 주주가치에 대한 집착이 가져온 결과를 봐라. 끔찍한 경제, 인종, 건강의 불평등이다.”

#하워드 슐츠(스타벅스 창업자): “금융위기 때 ‘직원들의 헬스케어 비용을 삭감하라’고 했던 기관 주주, 2013년 ‘스타벅스의 게이 권리 옹호가 이익을 해친다’고 비판한 한 주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제든 주식을 팔아도 된다고. 프리드먼이 남긴 유산은 그의 잘못된 대답이 아닌 ‘기업의 책임이 무엇인지’ 던진 질문 그 자체에 있다.”

NYT에는 대체로 프리드먼에 대한 비판이 돌아왔다. 반면 프리드먼이 교수로 재직한 시카고대가 주관한 기고문 50주년 특별 온라인 포럼에선 옹호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마침 프리드먼이 신념처럼 여겼던 ‘주주 자본주의’에 대한 반기가 세계 각지에서 불고 있기 때문에 논쟁은 더욱 뜨거웠다.

○ 주주에서 이해관계자로… “철학적 전환”


실제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 역시 올해 7월 “주주 자본주의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고,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기업들은 ‘양심’ ‘사회적책임’ ‘공정’과 같은 단어를 빈번하게 쓰고 있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프리드먼이 무덤에서 들으면 벌떡 일어날 일’들이다. 왜 지금, 기업의 존재 이유에 대한 논쟁에 불이 붙은 것일까.

처음 논쟁에 불을 지핀 곳은 주주 자본주의의 탄생지 미국이다. 지난해 8월 미국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제단체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BRT)은 기업의 목적을 주주 이익 극대화에서 이해관계자(stakeholder)의 번영으로 바꾸는 성명을 발표했다. 주주뿐 아니라 고객, 직원, 협력사, 지역사회 등 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에게 기여하는 것이 기업의 미션이라고 못을 박은 것이다.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애플의 팀 쿡, 제너럴모터스(GM)의 메리 배라 등 미국을 대표하는 CEO 181명이 참여했다.

이 성명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게 된 계기가 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주요한 철학적 전환”으로 평했다. 올해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의 주요 주제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였다.

국내에서는 SK그룹이 이해관계자의 이익이 기업 활동의 주요 목적임을 명시한 대표적 기업으로 꼽힌다. 올해 2월 SK는 자체 경영헌장 격인 ‘SK경영관리체계(SKMS)’를 4년 만에 개정하며 기업 구성원뿐 아니라 고객, 주주, 사회 및 비즈니스 파트너 등 이해관계자의 행복 추구를 기업의 핵심 가치로 내세웠다. 이 같은 내용은 SK 계열사 정관에도 반영됐다. 1월 다보스포럼에 참석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기업 경영 목표와 시스템을 주주에게서 이해관계자로 바꾸는 것은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됐다”고 강조했다.

○ 소득 양극화가 배경… 코로나도 불붙여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부상한 배경으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소득 양극화 심화가 꼽힌다. 장기 저성장을 가져온 금융위기의 원인이 ‘도덕적’이지 못한 금융회사에 있었다는 것, 시장이 이를 바로잡지 못했다는 것, 그럼에도 거대 기업은 ‘대마불사’로 정부 지원을 받고 살아남은 것에 대해 많은 이가 분노했다. 구글, 아마존, 애플과 같은 혁신 기업이 금융위기 이후의 미국 경제를 이끌었지만 정작 대다수 일반 국민이 취업할 수 있는 제조업은 침체됐다. 먹고살 길이 막막한 상황이 거대 기업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 정부에 ‘거대 기업을 규제하고 세금을 더 내도록 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진다. 이에 미 재계가 ‘우리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취지로 선제적 대응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배경은 4차 산업혁명이다. 인공지능(AI)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데이터가 필수다. 데이터는 사용자로부터 온다. 사용자가 기업의 이익에 기여하는 셈이다.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자선사업과 거리가 멀다. 디지털 전환이 가져오는 초생산성 시대에 소비자들의 소득 확대가 없다면 기업들도 지속적으로 돈을 벌기 어렵다”며 “데이터 제공자에 대한 보상이라는 필요성도 있기 때문에 (이익 환원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객과 근로자가 가치 지향적으로 변한 점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대두의 중요한 원인이다. 지난해 미국 텍사스주 월마트에서 무차별 총기 난사사건이 벌어졌다. 정부가 총기규제에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비판의 화살은 월마트로 향했다. ‘월마트는 임직원마저 총기 사고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계속 총을 팔아야 하는지’에 대해 비판과 질문이 쏟아지자 더그 맥밀런 월마트 CEO는 결국 총기 판매 제한 성명을 냈다. 심지어 정부에 총기규제 시행을 촉구한다고도 밝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팬데믹은 기업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에 에너지를 줬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놓은 것”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많은 기업은 록다운이 이어지는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고, 이를 고객과 근로자 협력사 정부가 지켜봤다. 가게 문을 닫은 상황에서 주주의 단기적 가치를 위해 대규모 해고에 나설 것인가, 직원과 지역사회를 위해 고용을 유지할 것인가. 프랑스 럭셔리 기업 에르메스는 고용 유지를 택했다. 에르메스의 여성복 아티스틱 디렉터인 나데주 바니 시뷸스키는 올해 8월 하퍼스바자와의 인터뷰에서 “코로나 시대에 (회사는) 은신처가 돼줬다”며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도 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경제적 은신처, 일을 계속 할 수 있다는 심리적 은신처였다”고 말했다.

○ 한국에서도 커지는 기업의 새 역할론


“기업의 시야가 너무 좁았던 점을 솔직히 반성한다.”

지난달 30일 최태원 회장은 경북 안동시에서 열린 한 포럼 강연에서 “기업은 ‘돈을 버는 것’이란 목적이 너무 강해서 (이해관계자들에 대한) 공감 능력이 없었다”며 “자기 좋은 것만 하는 것은 다른 가치를 무시하는 일이다. 그러면 사회가 기업을 벌하든지 기업이 사회를 무너뜨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업의 새 역할을 찾겠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도 ‘대기업의 새로운 역할’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SK가 기업 정관에 이해관계자의 행복을 기업의 핵심 가치로 포함시켰다면 삼성전자는 기업 비전으로 ‘동행’을 내세우고 있다. 지난해 50주년을 맞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우리 기술로 더 건강하고 행복한 미래를 만들자. 같이 나누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 세계 최고를 향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올해 5월 이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도 어떤 의미에서는 ‘노동 3권 보장’ 등 삼성의 가치관을 밝히는 자리였다.

다만 미국과 한국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양상은 다소 다르다. 미국은 주주 자본주의에 대한 대척점에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나왔다. 기업 경영진이 더 이상 주주에게 휘둘리지 않고, 장기적 가치를 추구하도록 힘을 돌려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한국은 기업 태동기부터 오너 일가와 동격인 경영진에 힘이 실려 있었고, 이에 대한 대척점으로 ‘경제 민주화’가 나왔다. 그래서 기관투자가나 소액주주에게 힘을 실어주는 주주 자본주의적 제도를 상법 개정 등으로 도입하는 과정에 있다. 한국 기업은 소액주주를 위한 주주 자본주의와 사회적책임을 요구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동시에 받아들여야 하는 셈이다. 한편 해외에서는 한국과 일본식 윤리경영, 사업보국 이념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와 맞닿아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풀어야 할 숙제도 적지 않다. 프리드먼은 기업은 세금을 내고, 정부와 국회가 그 돈을 공익을 위해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 경영진이 자원 배분까지 나서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고 봤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주창한 기업들이 실제로는 환경 및 노동법 위반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학계의 연구결과를 인용하며 “위선을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브루킹스연구소에서는 기업의 변화뿐 아니라 이를 뒷받침해주는 법률체계, 정부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경묵 교수는 “기업은 사업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라며 “기부를 많이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혁신적인 사업을 통해 더 많은 이해관계자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수 kimhs@donga.com·홍석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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