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VR로 체험하는 1920년대 구보의 감성

김민 기자

입력 2020-11-06 03:00 수정 2020-11-09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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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민미술관 ‘1920 기억극장…’전
‘구보, 경성 방랑’의 권하윤 작가


권하윤 작가의 작품 ‘구보, 경성 방랑’(2020년)에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을 다룬 장면. 일민미술관 제공

‘1920 기억극장 ‘황금광시대’’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는 그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던 공간이 전시실로 쓰인다. 일민 김상만(1910∼1994·전 동아일보 회장)의 집무실을 보존한 일민기념실이다. 권하윤 작가(39·사진)는 이곳에 ‘윤전기 멈춰요!’라는 네온사인 문구를 걸었다. 이는 1936년 동아일보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사진에서 유니폼의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 말소 사건’을 모티프로 했다. 서울 전시 설치를 마치고 프랑스에 있는 권 작가를 지난달 23일 화상통화로 만났다.


권 작가의 메인 작품은 1920년대를 가상현실(VR) 영상으로 재현한 ‘구보, 경성 방랑’이다.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년)에서 영감을 얻어 1920, 30년대 신문의 만문(漫文)만화(그림과 함께 긴 글을 덧붙인 만화)를 소재로 했다. 관객은 VR기기를 쓰고 그림으로 만들어진 공간을 걷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권 작가의 말을 빌리면 ‘수공업에 가까운 작업으로 탄생한 결과물’이다.

“만문만화에서 영감을 얻었기에 (그림은) 흑백으로 하되 손맛을 살리고 싶었어요. 기술적으로 가상공간에 직접 그릴 수 있어서 가상에서 조각하고 바느질하듯 영상을 제작했습니다.”


작품은 1920년대 경성을 산책하는 이야기로 구성된다. 흑백의 드로잉이지만 축음기에 가까이 가면 소리가 나고, 전차에 올라타면 실제로 이동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구보 씨가 도시를 방랑하듯 관객도 체험하길 바라는 의도의 설정이다.

“영상 작업을 하며 처음엔 답답함도 많았죠. 내가 봐주길 바라는 부분을 놓치거나, 영상 자체를 보지 않고 지나칠 때도 많으니까요. 이번엔 보는 사람의 자유에 좀 더 맡기자고 생각했어요.”


관객이 전차에 올라타야 이야기도 진행된다. 이 때문에 보는 사람마다 체험 시간도 조금씩 다르다. 어느 순간 흰 바탕이 검은색으로 바뀌는데, 검열에 관한 작가의 관심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100년 전 신문에서 검열된 지면은 검게 칠해졌죠. 영상에서도 검은 바탕은 검열된 공간이에요. 이 속으로 들어가면 ‘일장기 말소 사건’이 나옵니다. 모던한 도시는 사실 극소수의 기록된 역사란 생각이 들었어요. 일장기 말소 사건은 처음으로 우리가 일본을 지운 상징적 사건이니 강조하게 됐습니다.”

그는 이 사건이 ‘국민’이라는 의식을 가다듬은 계기라고 느꼈다. 구구절절 사건을 설명하기보다 짧은 순간의 열광을 시청각으로 표현한 이유다. 권 작가는 “관객이 VR기기를 어색해하지 말고 구보 씨가 느꼈던 움직임과 자유를 더 적극적으로 느끼길 바란다”고 했다.

2011년 프랑스 국립현대예술학교인 르프레누아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2015년 파리 현대미술관 팔레 드 도쿄에서 신인작가상을 받았고, 2017년 VR 작품 ‘새 여인’으로 같은 곳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기술을 활용해 직접 체험할 수 없는 장소나 기억의 경계를 탐구하는 작업으로 호평 받았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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