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 김기창 아내가 아닌… 예술가 박래현의 재발견
김민 기자
입력 2020-11-02 03:00 수정 2020-11-02 09:49
회화-판화 등 숨은 작품 138점 모아 ‘…삼중통역자’전
이번 전시가 열리기 전 박래현에 관한 최신 자료는 1997년 삼성문화재단이 발행한 ‘한국의 미술가: 박래현’이었다. 2011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에서 ‘운보와 우향: 40년만의 나들이’전이 열리기도 했지만 운보가 중심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박래현의 작품을 보던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박래현만 따로 봐도 충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정말 박래현은 김기창의 영향을 받기만 했을까?’
김기창과 박래현을 독자적인 두 명의 작가로 보자는 생각에서 이 전시는 시작됐다. 그러나 전작에 관한 자료가 없어 포털 사이트에 등록된 미술관과 박물관에 전화부터 돌렸다. 2018년 전시 준비를 시작할 때부터 주변에 소문도 많이 냈다. 입소문을 퍼뜨리면 숨은 작품이 등장할 거란 기대에서였다. 김 연구사는 “다행히 한 분 한 분이 서로 연결해 주어 ‘고구마 줄기를 캐듯’ 작품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찾아낸 1966년 태피스트리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됐다. 개인 소장가가 갖고 있었던 작품은 처음에 박래현의 것인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진위의 근거가 되어준 것은 1994년 발간된 김기창의 전작 도록. 사진이 취미였던 김기창이 남긴 1966년 부부전 사진에서 작품을 확인했다.
이렇게 구성한 전시에서 관객이 놀라는 것은 열성적인 예술가로서 박래현의 모습이다. 태피스트리 작품에서 그녀는 엽전, 철사, 목재는 물론이고 커튼 고리, 하수구 마개까지 다양한 재료를 결합해 조형 실험을 한다. 독일 바우하우스의 여성 작가 애니 앨버스(1899∼1994)가 직조 공방에서 태피스트리의 조형성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 1920년대다. 박래현은 1960년대 미국을 방문하며 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래현의 대표 작품인 추상화의 새로운 맥락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작품은 생전에 엽전, 맷방석(맷돌 밑에 까는 방석) 또는 금줄(아이를 낳았을 때 부정을 막으려고 거는 새끼줄)에 비유되곤 했다. 김 연구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토속적 소재에만 비유되거나 역사인식이 없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래현은 이들 작품에 대해 1967년 ‘태양의 생활력을 황색으로, 인간의 생명은 피로, 타산을 벗어날 수 없는 시대의 신중성을 흑빛의 침묵으로 나를 대변했다’고 썼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붉은색, 노란색, 검은색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다.
김 연구사는 초기 회화부터 판화까지 “도상과 질감, 색채와 조형성에서 서로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며 “그 단서가 되는 작품을 한두 점씩 전시장에 배치해 두었으니 꼭 확인해 보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년 1월 3일까지. 무료.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박래현의 추상작품 ‘영광’(1966∼67년), 종이에 채색, 134×168cm. 생전에는 엽전, 맷방석, 금줄을 소재로 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그가 남긴 글에 따르면 자연과 사회에 관한 생각을 상징적으로 담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운보 김기창(1913∼2001)의 아내가 아닌 예술가 우향 박래현(1920∼1976)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20여 년 만이다. 그녀가 남긴 작품의 이름과 제작 시기도 이번에 새롭게 정리됐다. 그 결과물을 서울 중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관에서 열리는 ‘박래현, 삼중통역자’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회화 판화 태피스트리 등 작품 138점과 그가 생전에 썼던 글이 전시 중이다.이번 전시가 열리기 전 박래현에 관한 최신 자료는 1997년 삼성문화재단이 발행한 ‘한국의 미술가: 박래현’이었다. 2011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에서 ‘운보와 우향: 40년만의 나들이’전이 열리기도 했지만 운보가 중심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박래현의 작품을 보던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박래현만 따로 봐도 충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정말 박래현은 김기창의 영향을 받기만 했을까?’
김기창과 박래현을 독자적인 두 명의 작가로 보자는 생각에서 이 전시는 시작됐다. 그러나 전작에 관한 자료가 없어 포털 사이트에 등록된 미술관과 박물관에 전화부터 돌렸다. 2018년 전시 준비를 시작할 때부터 주변에 소문도 많이 냈다. 입소문을 퍼뜨리면 숨은 작품이 등장할 거란 기대에서였다. 김 연구사는 “다행히 한 분 한 분이 서로 연결해 주어 ‘고구마 줄기를 캐듯’ 작품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찾아낸 1966년 태피스트리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됐다. 개인 소장가가 갖고 있었던 작품은 처음에 박래현의 것인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진위의 근거가 되어준 것은 1994년 발간된 김기창의 전작 도록. 사진이 취미였던 김기창이 남긴 1966년 부부전 사진에서 작품을 확인했다.
1973년 미국 밥 블랙번 스튜디오에서 판화를 만들고 있는 박래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렇게 구성한 전시에서 관객이 놀라는 것은 열성적인 예술가로서 박래현의 모습이다. 태피스트리 작품에서 그녀는 엽전, 철사, 목재는 물론이고 커튼 고리, 하수구 마개까지 다양한 재료를 결합해 조형 실험을 한다. 독일 바우하우스의 여성 작가 애니 앨버스(1899∼1994)가 직조 공방에서 태피스트리의 조형성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 1920년대다. 박래현은 1960년대 미국을 방문하며 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래현의 대표 작품인 추상화의 새로운 맥락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작품은 생전에 엽전, 맷방석(맷돌 밑에 까는 방석) 또는 금줄(아이를 낳았을 때 부정을 막으려고 거는 새끼줄)에 비유되곤 했다. 김 연구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토속적 소재에만 비유되거나 역사인식이 없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래현은 이들 작품에 대해 1967년 ‘태양의 생활력을 황색으로, 인간의 생명은 피로, 타산을 벗어날 수 없는 시대의 신중성을 흑빛의 침묵으로 나를 대변했다’고 썼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붉은색, 노란색, 검은색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다.
김 연구사는 초기 회화부터 판화까지 “도상과 질감, 색채와 조형성에서 서로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며 “그 단서가 되는 작품을 한두 점씩 전시장에 배치해 두었으니 꼭 확인해 보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년 1월 3일까지. 무료.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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