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청희의 젠틀맨 드라이버]‘레인지 로버 피프티’가 온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입력 2020-10-23 03:00 수정 2020-10-23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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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간 지켜온 럭셔리 SUV 자리
탄생 50주년 맞은 ‘레인지 로버’
한정판 ‘… 피프티’ 1970대 판매


50주년 기념 모델인 레인지 로버 피프티(사진 앞쪽)와 초대 레인지 로버가 함께 달리고 있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2000년을 전후해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럭셔리 브랜드들이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 빠르게 주류 승용차 시장을 파고든 SUV의 인기가 점차 값비싼 고급차 소비자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1980년대에 들어서 SUV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할 때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그전까지 비슷한 종류의 차들은 흔히 ‘오프로더’ 또는 ‘4X4(포바이포)’라고 불렸다. 오프로더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런 차들은 네 바퀴굴림 즉 사륜구동 장치를 갖추고 평범한 승용차로 가기 어려울 만큼 험한 길을 달리는 데 특화돼 있었다. 군대나 경찰 같은 국가기관이나 오지 탐험가들, 낙후된 지역에 사는 사람을 돕는 봉사단체 등이 오프로더를 주로 찾았다. 심지어 광활한 경작지나 농장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농기구처럼 쓰이기도 했다. 뿌리부터 살펴보면 SUV는 거친 환경에서 일하는 일꾼 이미지가 강했고, 럭셔리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그와 같은 개념을 뒤집은 차 가운데 하나가 바로 레인지 로버다. 럭셔리 승용차처럼 편안하면서 험로를 거뜬히 달릴 수 있는 차. 지금 기준으로는 어색한 표현이 아니지만, 레인지 로버가 처음 나왔을 때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영국 로버의 새 차 개발 책임자였던 찰스 스펜서 킹이 레인지 로버 개발을 계획할 때 염두에 둔 것이 일반 도로에서는 편안하고 잘 달리면서도 탁월한 험로 주파 능력을 갖춘 차였다. 그런 생각이 실현된 차, 레인지 로버가 완성돼 세상의 빛을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딱 50년 전인 1970년이었다.


1970대 한정 판매되는 레인지 로버 피프티에는 특별한 명판이 붙는다.

클래식 레인지 로버라고 불리는 1세대 레인지 로버는 여러 면에서 당대 다른 오프로더들과 달랐다. 항상 네 바퀴에 모두 동력이 전달되는 상시 사륜구동 장치를 갖췄고, 서스펜션에 판 스프링 대신 코일 스프링을 달아 승차감이 뛰어났다. 초기에 실용성에 초점을 맞춰 간소했던 실내 꾸밈새는 구매자의 의견을 반영해 차츰 고급화됐다.

첫 레인지 로버에서 무엇보다 돋보인 것은 세련된 스타일이었다. 간결한 선과 면으로 이뤄진 차체는 단단하면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냈다. 기능을 넘어서는 형태에 대한 도전은 미학적으로 인정받아, 레인지 로버는 1971년에 자동차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됐다. 그리고 모서리 부분까지 일체형으로 만든 이른바 클램셸(clamshell) 보닛, 넓은 유리로 차체와 분리된 듯한 모습의 지붕, 위아래로 나뉘어 열리는 트렁크 문과 같은 여러 독특한 요소들은 레인지 로버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데뷔 이후 10년 남짓 2도어 모델만 만들어진 1세대 레인지 로버는 1981년에 4도어 모델이 나오고 1982년에 자동변속기를 갖추면서 더욱 세련된 차로 발전했다. 이전까지 조금 부족했던 호화로움도 가죽 내장재, 원목 장식, 다양한 편의장비를 더함으로써 충실해졌고, 1986년 미국 시장에 발을 들여 놓으며 진정한 럭셔리 SUV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1세대 모델은 고전적이고 우아한 이미지로 높은 인기를 누린 덕분에 1994년에 2세대 모델이 나온 뒤로도 한동안 ‘레인지 로버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됐다.

이후 레인지 로버는 여러 세대에 걸쳐 럭셔리 SUV에 걸맞은 변화를 거듭했고, SUV 기술 혁신을 이끌었다. 2세대 모델에서는 높이 조절식 서스펜션을, 3세대 모델에서는 에어 스프링을 활용한 독립 서스펜션과 요트에서 영감을 얻은 실내 디자인을, 4세대 모델에서는 차체 전체를 알루미늄 합금으로 만든 경량 구조와 간단한 기기 조작만으로도 지형에 맞춰 주행 특성과 차체 높이가 자동 조절되는 기술을 선보였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모델은 2012년에 첫선을 보인 4세대로, 처음으로 차체 길이를 늘린 롱 휠베이스 모델과 좌우 분리형 초호화 뒷좌석을 갖춘 모델이 출시됐다. 럭셔리 세단처럼 뒷좌석 탑승자의 안락함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모델이 더해지면서, 지금의 레인지 로버는 1세대 모델을 개발할 때 목표로 삼았던 ‘럭셔리 승용차처럼 편안하면서도 험로를 거뜬히 달릴 수 있는 차’라는 명제를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레인지 로버는 이제 특정 모델의 이름에 머무르지 않고 이보크, 벨라, 레인지 로버 스포츠와 같은 모델을 거느린 브랜드가 됐다. 물론 이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1세대 모델부터 오랜 세월 이어지며 쌓인 레인지 로버의 명성과 이미지 덕분이다.

이처럼 의미 있는 모델인 레인지 로버의 탄생 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랜드로버는 6월에 특별 한정 모델인 ‘레인지 로버 피프티(Ranger Rover Fifty)’를 발표했다. 1세대 모델이 데뷔한 해의 숫자와 같은 1970대만 한정 생산해 전 세계에 판매한다.

한정 모델에는 일반 모델과 달리 특별한 치장들이 더해진다. 랜드로버 최고 디자인 책임자인 게리 맥거번의 ‘피프티’ 사인이 차체 안팎 곳곳에 들어가고, 앞좌석 사이에 있는 센터 콘솔에는 1970대 중 한 대라는 것을 알리는 명판을 붙인다. 아울러 두 가지 전용 22인치 휠을 선택할 수 있고, 전통과 역사를 상징하는 네 가지 차체색 외에도 1세대 모델에 쓰인 것과 같은 세 가지 차체색 즉 터스칸 블루(파란색), 바하마 골드(연갈색), 다보스 화이트(흰색) 중 하나를 선택해 주문할 수도 있다.

유서 깊은 맞춤 정장 업체인 헨리 풀 앤 컴퍼니가 만든 레인지 로버 50주년 기념 재킷 스케치.
또한 8월에는 런던 맞춤 정장 거리인 새빌 로의 유서 깊은 업체 중 하나인 헨리 풀 앤 컴퍼니(Henry Poole & Co)와 협업해 50주년 기념 재킷을 만든다고 밝혔다. 1806년에 창업해 두 세기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헨리 풀은 영국 왕실을 비롯해 많은 유명인사의 정장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레인지 로버 50주년을 기념해 만드는 재킷에서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원단이다. 직물 제조업체인 폭스 브라더스 앤 컴퍼니(Fox Brothers & Co., Ltd.)가 만든 원단은 1세대 레인지 로버의 세 가지 차체색에서 영감을 얻어, 120m 길이의 세 가지 색 양모 원사를 체크 패턴으로 직조했다. 이 원단으로 헨리 풀은 정확히 50명분의 남성용 및 여성용 재킷을 맞춤 제작한다. 이는 레인지 로버의 역사와 전통을 기리는 영국적이면서도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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