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정부 들어 내부지침 16개 고친 공정위… 절반이 ‘규제 강화’

세종=남건우 기자

입력 2020-09-18 03:00 수정 2020-09-1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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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고발기준 등 마련한 내부규정… 법적 구속력 없지만 실질적 영향 커
‘일반적 대가’ ‘상당히 유리’ 등… 내용 모호해 재계 경영부담 호소
전문가 “추상적 지침 불확실성 키워”


수년 전 ‘일감 몰아주기’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 조사를 받았던 A기업은 이후 꼬박꼬박 로펌 자문을 거쳐 계열사 간 거래를 진행했다. 하지만 공정위는 같은 업종에 있는 다른 회사가 A기업의 계열사 간 거래보다 더 낮은 가격에 거래한 사례가 있다며 A기업에 제재를 가했다. A기업 관계자는 “타사는 거래처를 뚫기 위해 싸게 거래한 건데 공정위는 이를 우리 회사의 계열사 부당 지원 증거로 봤다. 최근 관련 심사지침이 개정됐는데도 여전히 부당 지원 판단 기준이 모호해 난감하다”고 말했다.

현 정부 들어 공정위가 새로 만들거나 고친 내부지침 16개 가운데 절반 정도가 기업 부담을 늘리는 방향인 것으로 나타났다. 공정위는 “투명하고 일관되게 법 집행을 하겠다”며 내부지침을 손댔지만 여전히 기준이 모호해 자의적 해석이 개입할 여지가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 16개 중 8개 지침이 ‘규제 강화’

17일 공정위에 따르면 2017년 7월부터 이달까지 새로 제정되거나 개정된 공정위 심사·고발 관련 지침은 16개로 집계됐다. 심사·고발지침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공정위가 법을 해석하는 내부 규정이라 기업들이 따라야 하는 ‘그림자 규제’, ‘숨어 있는 규제’로 통한다.

산업계와 경제단체에서는 제정·개정된 16개 지침 가운데 8개가 기업들의 부담을 늘리는 ‘규제 강화’라고 보고 있다. △공정위 내부적으로 고발 기준을 마련한 고발지침 2개 △위법 행위에 대한 판단 기준을 규정한 심사지침 4개 △유통업 납품·입점업체의 행사 비용을 규정한 심사지침 2개 등이다.

재계는 특정 행위의 위법성 기준을 명확하게 규정해야 할 심사·고발지침의 내용이 전반적으로 모호하고 구체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1월 제정된 ‘부당특약 심사지침’에 따르면 원청업체가 하청업체 기술을 사용할 때 거래 관행에 비춰 일반적인 대가를 지급했는지에 따라 공정위는 위법성을 판단한다. 하지만 ‘일반적 대가’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또 ‘자료제출의무 위반 행위에 대한 고발지침’에 따르면 기업들은 공정위가 제재와 관련해 요구한 자료를 제출하지 않거나 허위로 제출하면 고발당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들은 자료의 범위가 너무 넓은 데다 단순 실수로 자료를 잘못 제출해도 고발당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B기업 관계자는 “검찰이나 경찰에 비해 공정위의 자료 요구 범위가 명확하지 않다. 공정위가 달라는 대로 자료를 줄 수밖에 없다”고 했다.

○ “모호한 지침, 경영 불확실성 높여”

조사 당국의 법령 해석 재량권이 지나치게 크다는 지적도 나온다. 2월 시행된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심사지침에서 공정위는 계열사가 총수 일가에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하는 것을 부당이익 제공의 판단 기준으로 본다. 재계 관계자는 “상당히 유리한 조건에 대한 판단을 사실상 공무원 재량에 맡긴 것”이라고 했다.

공정위의 내부지침으로 소비자 이익이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판촉비 부담전가 행위 심사지침’에 따라 유통기업들은 납품·입점업체의 자발적 요청이 있을 때만 해당 기업에 판촉비용의 50%를 초과해 부담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C기업은 “납품업체가 제품 홍보를 위해 판촉비를 50% 초과해 부담한다고 해도 ‘자발성’의 요건이 모호해 언제든 공정위 제재를 받을 수 있어 피한다”며 “고객 입장에서는 할인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라고 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지침은 기업들의 경영 활동에 불확실성을 높여줄 뿐”이라고 했다.

세종=남건우 기자 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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