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예술 테러리스트’, 알고보니 ‘착한 레지스탕스’

김민 기자

입력 2020-09-01 03:00 수정 2020-09-0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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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 괴짜 뱅크시의 생존법
풍자-쇼맨십으로 존재 알리고 팔레스타인 분리장벽에 평화 벽화
경매선 낙찰 받은뒤 ‘작품 파쇄쇼’


뱅크시가 재정적으로 후원한 난민 구호선 ‘루이즈 미셸’호. 지난해 9월 뱅크시는 난민 구조 활동가인 피아 클렘프에게 “난민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번 돈을 내가 쓸 수 없으니 새 선박을 사 달라”고 e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배에 탄 난민이 수용 인원을 넘어 구조 요청을 위해 뱅크시는 이 사실을 공개했다. 지중해=AP 뉴시스
영국 브리스틀 출신의 예술가 뱅크시가 최근 난민 구조선에 재정 지원을 한 사실을 밝혀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뱅크시는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인스타그램을 통해 “예술계에서 큰돈 벌었다는 사람들처럼 나도 요트를 샀다. 오래된 프랑스 군함이고 이름은 루이즈 미셸”이라고 밝혔다. ‘루이즈 미셸’은 지중해에서 유럽 땅을 향해 생존을 걸고 표류하는 보트 피플을 구호하는 구조선이다.

뱅크시는 거리의 벽화 그라피티로 예술 활동을 시작한 이른바 스트리트 아티스트다. 세계에 많은 스트리트 아티스트가 있지만 미술사에 남을 작가는 장미셸 바스키아, 키스 해링 정도다. 미술계에서는 뱅크시가 그렇게 기억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얼굴도 나이도 공개한 적 없는 뱅크시는 어떻게 미술계에서 생존하는 것일까.

○ 뼈 있는 깜짝 농담
뱅크시는 경매에서 낙찰된 자신의 작품을 곧바로 파쇄해 대중의 눈길을 끌거나, 자신의 모습과 동선을 비밀에 부친 상태에서 작품을 ‘깜짝 발표’한다. 이런 충격요법 또는 스캔들 방식으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기에 뼈 있는 농담, 즉 블랙코미디를 가미한다.

뱅크시가 음울한 풍자를 담아 만들었던 테마파크 ‘디즈멀랜드’. Byrion Smith
2017년 뱅크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이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요르단강 서안 분리장벽 옆에 호텔을 연다. 이름은 ‘월드오프 호텔(Walled Off Hotel·벽으로 막힌 호텔)’, 홍보 슬로건은 ‘세상 최악의 뷰(view·전망)를 자랑합니다’였다. 막사처럼 꾸민 저렴한 호텔 객실에는 베개싸움 하는 군인들 벽화가 그려졌다. 미국 뉴욕 최고급 호텔 ‘월도프(Waldorf)’의 디스토피아 버전이었다.

2018년에는 브리스틀에 디즈니랜드의 ‘지옥 버전’인 디즈멀랜드(Dismaland·절망의 땅)를 만든다. 호박마차가 전복돼 바닥에 고꾸라진 신데렐라, 멀미를 일으킬 듯한 인어공주 동상이 등장했다. 이곳의 슬로건은 ‘어린이에겐 적합하지 않은 가족 공원’. 뱅크시는 디즈멀랜드를 공개하며 “테마파크는 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고 꼬집었다.

○ 사회와의 연결고리
다큐멘터리 영화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에서 모습을 드러낸 뱅크시. ⓒ뱅크시
문제는 스캔들 그 후다. 대중을 놀라게 하는 데 그친다면 선정주의에 불과하다. 뱅크시에 대해 비판도 ‘쇼맨십이 강하다’ ‘진지한 주제를 너무 유머러스하게 다룬다’ 등이다. 이 같은 비판에 맞서는 뱅크시만의 방법은 사회적 이슈와 작품의 연결고리를 맺는 일이다.

지난달 21일 요르단강 서안 지역 투어가이드들은 ‘뱅크시 헌정 전시’를 열었다. “뱅크시 덕분에 ‘대안관광’이 활성화됐다”며 뱅크시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곳곳에 그린 벽화 사진 20점을 내건 소규모 전시였다. 뱅크시의 그라피티와 월드오프 호텔을 보러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며 경기가 나아졌기 때문이다. 앞서 뱅크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다룬 작품의 판매 수익 220만 파운드(약 35억 원)를 뇌졸중 병원 건립 기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디즈멀랜드 전시가 끝난 뒤에는 해체된 각종 자재를 프랑스 칼레의 난민캠프에 기부했다.

국제 미술계에서는 예술 작품의 가치를 크게 미술사적, 미학적, 미디어적, 사회적 가치로 분류한다. 미술사적 가치는 세대가 지나도 기억될 역사성이 있느냐, 미학적 가치는 철학적으로 가치가 있느냐를 따진다. 반면 뱅크시는 대중에게 어필하는 미디어적 가치로 높게 평가받는다. 여기 루이즈 미셸 지원같이 국제적 이슈의 현장에 뛰어들며 사회적 가치도 높여가고 있다. 영리한 작가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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