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 클린트’ 열풍… 국내에도 상륙하나

김민 기자

입력 2020-08-13 03:00 수정 2020-08-1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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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보다 먼저 추상화 그린 여성작가
1906년 첫 추상작품 인정 못 받아
1944년 “20년간 공개말라” 유언
42년 지나서야 공개 100만 관객 대박


다큐멘터리 영화 ‘힐마 아프 클린트―미래를 위한 그림’에서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의 아프 클린트 회고전 장면.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2013년 스웨덴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미국도 서유럽도 아닌 미술사의 변방 스웨덴에서 ‘추상미술의 개척자’라는 야심 찬 제목의 전시가 열렸다. 제목만 보면 대부분 칸딘스키나 몬드리안이 떠오른다. 뜻밖에도 이 전시의 주인공은 미술계에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스웨덴 여성 작가 힐마 아프 클린트(1862∼1944)였다. 이 전시는 이후 노르웨이, 스페인, 덴마크를 거쳐 독일 베를린까지 순회하며 관객 100만 명이 찾는 대흥행을 이뤘다.

‘아프 클린트 열풍’이 조만간 국내에도 상륙할 것으로 보인다. 먼저 다큐멘터리 영화 ‘힐마 아프 클린트―미래를 위한 그림’이 개봉 시기를 조율 중이다. 독일 미술사가 율리아 포스의 ‘아프 클린트 전기’도 풍월당에서 번역 출간할 예정이다. 포스는 독일 유력 일간지 프랑크프루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미술사는 다시 쓰여야 한다’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아프 클린트를 소개해 화제를 모았다.

○ 사후 42년 만에 공개된 그림
아프 클린트 회고전은 두 가지 점에서 미술계를 놀라게 했다. 첫째는 그가 칸딘스키보다 앞서 추상을 그렸다는 것, 둘째는 그런데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신지학은 상대성 이론 등 과학의 발전과 맞물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탐구하고자 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힐마 아프 클린트는 세상을 추상화한 그림을 그렸다. 왼쪽 사진부터 ‘Dove No. 2’(1915년), ‘Group X, No. 1, Altarpiece’(1915년), ‘The Ten Largest, No. 7, Adulthood’(1907년). 마노엔터테인먼트·Zeitgeist Films 제공
아프 클린트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신지학(神智學)에 심취했다. 독일 신지학협회 회장이던 루돌프 슈타이너에게 편지를 써 직접 만날 정도로 진취적이던 그는 신지학의 영향으로 추상화를 그렸다.

그가 첫 추상 작품 ‘원시적 혼동’을 그린 것은 1906년. 칸딘스키가 처음 그린 1911년에 조금 앞섰다. 그런데 1908년 슈타이너로부터 ‘이 그림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테니 향후 50년 동안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라’는 충격적 이야기를 듣는다. 이후 수년간 작업은 끊겼지만 아프 클린트는 자신만을 위한 그림을 이어갔다.

아프 클린트는 1944년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추상 작품은 20년간 공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1986년, 작품 일부가 미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기획전에서 처음 빛을 봤다.

○ ‘미술사는 다시 쓰여야 한다’
힐마 아프 클린트
11일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미리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 ‘미래를 위한 그림’에는 아프 클린트가 미술사에서 배제된 과정이 잘 드러난다. 그가 살아 있을 때는 여성 작가라는 이유로, 죽어서는 연구나 전시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미술관에서 거부됐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아프 클린트는 스웨덴 왕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미술학교에서 여성에게 그림은 부업에 불과했다. 여성의 ‘직업’이 주부밖에 없는 상황에서, 결혼하지 못한 여성이 삽화나 일러스트레이션 등의 소일거리로 돈을 벌기 위해 가는 곳이 미술학교였다. 그럼에도 아프 클린트는 사회와 과학, 사상의 흐름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자신만의 추상을 그렸다. 다만 세상에 공개할 수 없을 뿐이었다.

아프 클린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그림을 물려받은 아프 클린트의 조카는 20년이 지나고 미술관을 찾아간다. 그러나 전시 이력이 없고 미술계에서 생소하다는 말만 들은 채 그림을 보여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의 그림들은 지하실 한구석에서 종이에 꽁꽁 싸여 수십 년간 잠들어 있었다.

국제 미술계는 백인 남성 중심의 모더니즘 미술사를 원점에서 다시 돌아보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신데렐라처럼 등장한 아프 클린트의 은폐된 작품들이 ‘재평가’의 시험대에 올랐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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