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이식 감소 애타는 중환자들… “뇌사판정-기증동의 간소화해야”[인사이드&인사이트]

박성민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입력 2020-08-10 03:00 수정 2020-08-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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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째 그대로인 한국 장기기증법



박성민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올 5월 영국에선 이른바 ‘맥스와 키이라법’으로 불리는 새로운 장기기증법이 시행됐다. 모든 성인이 장기기증자 등록부에 기증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장기기증의 뜻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옵트 아웃’ 제도 도입이 핵심이다. 이는 환자가 장기기증 의사를 밝혔을 때는 보호자의 동의율이 92%에 이르는 반면, 그렇지 않을 때는 48.5%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한 조치다. 모든 성인을 ‘잠재적 장기기증 동의자’로 간주해 유족의 동의율을 높이고 더 많은 생명을 살리겠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법 개정을 주도한 이는 장기이식으로 새 생명을 얻은 11세 소년 맥스 존슨의 어머니였다. 맥스는 2017년 교통사고로 뇌사 판정을 받은 키이라 볼(당시 9세)의 심장을 이식 받았다. 맥스의 어머니는 애타게 이식을 기다리는 다른 환자들을 돕기 위해 법 개정 운동을 이끌었다. 영국의사협회도 “더 많은 생명을 구하는 법안”이라며 법 개정을 반겼다.

장기기증에 옵트 아웃 제도를 도입한 나라는 영국이 처음은 아니다. 세계에서 인구 100만 명당 장기기증자가 가장 많은 스페인(48.9명)은 1979년 이 제도를 도입해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을 크게 바꿀 수 있었다. 프랑스(33.3명)는 1976년부터, 네덜란드(14.9명)도 올해부터 같은 내용의 법을 시행 중이다. 네덜란드는 18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기증 희망 여부를 묻는 서한을 보내 ‘예, 아니요’를 선택하거나 친척이나 지인에게 결정을 위임하도록 했다. 이미 장기기증이 활성화된 유럽 선진국들이 이처럼 법과 제도 개선에 적극적인 이유는 장기이식이 만성질환자들의 고통을 덜어 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의료기술 발달로 질병 사망률은 낮아졌지만 제 기능을 못하는 장기로 연명하거나, 장기이식를 받지 못해 생을 마감하는 이식 대기자는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올 1월 크로아티아(34.6명)는 보건의료의 최우선 순위로 노화, 암 치료와 함께 ‘장기기증 및 이식’을 꼽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2000년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지만, 큰 틀은 20년이 지나도록 그대로다. 의료계에선 선진국에 비해 까다로운 뇌사 판정 절차와 보호자의 기증 동의 절차를 간소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정부나 국회가 입법에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어서다. 국제장기기증 및 이식 등록기구(IRODaT)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한국의 인구 100만 명당 장기 기증자는 8.7명으로 미국(36.9명), 벨기에(30.4명) 등을 크게 밑돌았다.

○ 코로나19 사태 이후 장기기증 서약 25% 급감

어릴 적 소아당뇨를 앓아 신장과 췌장 기능을 거의 상실한 김모 씨(36·여)는 2014년부터 7년째 장기이식을 기다리고 있다. 이식 조건이 맞는 뇌사자가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은 것만 10차례. 하지만 이식은 매번 무산됐다. 한 번은 보호자의 기증 동의까지 받아 수술실에 누웠지만 기증자의 췌장 상태가 나빠 수술이 중단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엔 장기기증 서약을 한 젊은 뇌사자가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고 잠시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유족들의 반대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다행히 의료진의 설득으로 며칠 뒤 유족들이 마음을 바꿨지만 뇌사 후 시간이 너무 지체돼 장기는 이식이 어려울 만큼 손상된 뒤였다. 김 씨는 “이제 장기이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9일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에 따르면 김 씨와 같은 장기이식 대기자는 올 7월 말 기준 4만1262명으로 사상 처음으로 4만 명을 넘었다. 지난해 말 3만9405명에서 7개월 만에 1857명이 늘었다. 그러나 장기이식 건수는 뒷걸음질치고 있다. 2016년 573명이었던 뇌사 장기기증자는 지난해 450명까지 줄었다. 유족의 반대, 뇌사 판정 지연 등 원인은 다양하다. 그 사이 하루 평균 5.9명(지난해 기준)이 장기이식을 기다리다 숨졌다.

최근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라는 악재까지 겹쳤다. 올 들어 7월 말 까지 장기기증 희망등록자는 4만1512명으로 전년 동기(5만5473명) 대비 25.2%나 급감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위해 학교와 종교기관에서 대면 캠페인을 중단하면서 등록자가 뚝 떨어진 것이다.

장기기증 희망등록자는 2013년 15만4798명을 기록한 뒤 2018년 7만763명으로 꾸준히 감소 추세였다가 지난해 9만350명으로 6년 만에 반등했다. 미성년자가 부모 동의 없이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할 수 있는 나이를 만 19세에서 만 16세 낮추면서 젊은층의 호응이 커진 게 주효했다. 김동엽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사무처장은 “장기기증 문화를 더 확산시킬 수 있는 기회였는데, 코로나19로 공백이 생기면서 열기가 식게 돼 아쉽다”고 말했다.

○ 장기기증 희망자 미국의 20분의 1 수준

지난해 뇌사 판정을 받은 2484명 중 실제 이식까지 이어진 뇌사자는 450명. 1239명(49.9%)은 유족이 의료진과 만나는 것을 거부하거나 상담 후에도 기증에 동의하지 않아 이식 절차가 중단됐다. 뇌사 추정자 통보부터 뇌사 판정 때까지 사망한 경우가 250명, 보호자가 없어 이식 동의를 못 받은 사례도 30명이나 됐다. 지난해 뇌사자 1인당 평균 3.58명이 장기를 이식 받은 점을 고려하면 산술적으로 5000명 이상이 새 삶을 찾을 기회를 놓친 셈이다.

유족의 동의율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장기기증 희망등록자를 늘리는 것이다. 국내 장기기증 희망누적등록자는 전 국민의 2.8%(229만 명)로 미국(40%) 등에 크게 못 미친다. 장기기증이 활발한 국가에선 기증 희망등록자가 뇌사에 빠졌을 때 보호자의 동의율은 대개 90%를 넘는다. 반면 국내 뇌사자 보호자의 동의율은 33%(2019년 기준)에 머물렀다. 2016년에 52.7%까지 올라갔지만 2017년 장기 기증자 시신 인계 논란이 불거지면서 부정적 여론이 커진 탓이다.

의료계에선 뇌사 판정 절차를 간소화해야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지난해 뇌사 판정 중 사망하거나 개복 후 장기 상태가 불량해 이식을 못한 경우는 270건. 이 중 상당수는 뇌사 판정 시간을 조금만 더 앞당겼더라면 이식이 가능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한국은 뇌사 판정을 받으려면 4단계 과정 중 뇌파검사 1회와 무호흡검사 2회를 무조건 받도록 돼 있다. 하지만 해외에선 같은 검사를 반복하는 것을 최대한 피한다. 조광욱 부천성모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검사 시간이 길어져 환자가 사망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며 “해외처럼 불필요한 검사를 줄이고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초음파 검사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뇌사판정위원회가 제 역할을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의료인 9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75.3%가 뇌사 판정의 절차 개선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판정 절차가 복잡하다고 답한 45명 중 54.6%는 뇌사판정위원회의 축소나 폐지를 원했다. 비의료인까지 포함해 4∼6인으로 구성해야 하는 뇌사판정위원회를 꾸리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 장기기증 허용대상자 확대 등 활성화 대책 마련 시급

장기기증을 할 수 있는 환자를 반드시 ‘뇌사자’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의료계의 공통된 견해다. 향후 의료 기술 발달과 교통사고 감소 등으로 뇌사자 발생은 갈수록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스페인 등 유럽 상당수 국가들은 심장이 멈춰 숨진 환자의 장기기증을 허용하고 있다. 영국은 전체 장기기증의 약 42%, 네덜란드는 59%가 이런 ‘심정지 후 장기기증’이다. 이상호 강동경희대병원 신장내과 교수는 “스페인의 신장 이식 대기 기간이 약 2년인 반면, 한국은 평균 6.2년이 걸린다”며 “한국도 심장사 환자의 장기기증을 공론화할 때”라고 강조했다.

장기기증이 활성화되려면 급변하는 가족구조 등에 맞춰 제도 운영이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현행법은 장기이식 전 유족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데, 배우자부터 직계비속, 직계존속, 형제자매 등 순으로 선순위자를 규정하고 있다. 장경숙 한국장기조직기증원 홍보부장은 “1인 가구가 늘고 예전보다 가족 간 교류가 줄어들면서 유족 찾기가 힘들어졌다”며 “사실혼 관계나 친구 등 보호자 범위를 넓히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기를 기증하는 행위가 망자(亡者)나 유족에게 더 뜻깊은 일이 되도록 예우를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미국은 추모공원을 만들어 기증자의 뜻을 기린다. 유족에게는 최소 18개월 동안 심리상담 등 돌봄 서비스가 제공된다. 유족과 이식자의 최소한의 교류도 허용한다. 서신 교환부터 시작해 실제로 만날 수도 있다.

2016년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뒤 6명에게 장기를 기증하고 숨진 고 김유나 씨의 어머니 이선경 씨는 올해 초 한국에서 딸의 장기를 기증받은 이식자를 만났다. 이 씨는 “그 만남을 통해 유나의 삶이 사고로 끝나지 않고, 이식자를 통해 계속 이어진다고 느끼게 됐다”며 “한국도 다른 나라처럼 기증자와 유족의 자긍심을 높여주도록 제도적 뒷받침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성민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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