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컬 칼럼]폭식 먹방이 위험해 보이는 이유

동아일보

입력 2020-07-22 03:00 수정 2020-07-2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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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먹을래요?”

영화 ‘봄날은 간다’의 여주인공 은수(이영애 분)의 대사다. 라면은 유혹의 언어다. 또 “내가 라면으로 보여?”라는 상우(유지태 분)의 말에서 라면은 사랑이 떠나갈 것을 예감하는 불안과 상처받은 자존감을 알리는 분노의 언어다. 이처럼 음식에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등으로 이뤄져 신체를 구성하는 화학 성분의 조합을 넘어서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찌감치 프로이트는 인간의 심리발달에서 먹는 것의 결정적인 역할을 간파하고 구강기라는 발달 단계를 심리발달의 첫 단계로 설정했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심리적 과제는 주양육자와의 관계를 통해 타인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감을 형성하고, 음식을 통해 삶에서의 여러 감각적 즐거움과 편안한 쾌락을 충분히 경험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 문제가 생기면 음식을 둘러싼 다양하고 복잡한 어려움을 겪는다. 거식증, 폭식증과 같은 식이장애가 대표적이다. 필자는 최근 유튜브에서 ‘폭식 먹방’을 우연히 봤는데 정말 충격이었다. 그런 채널이 한두 개가 아니고 구독자나 시청자 수가 몇십만 명, 몇백만 명 수준이라는 걸 알고 한 번 더 놀랐다.

체구가 작은 진행자가 거구의 성인 남성 기준으로 10인 분이 넘어 보이는 음식을 단숨에 먹는 영상도 많았다.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정신과 의사 입장에서 보기에는 폭식증으로 의심됐다. 경우에 따라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좀 더 많이 먹을 수는 있겠지만, 말 그대로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 같은 건 없다. 심한 갑상선항진증이나 암과 같은 소모성 질환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폭식증의 경우 거의 예외 없이 폭식 이후에 ‘퍼징(purging)’이라는 행위가 뒤따른다. 퍼징은 과도한 칼로리를 몸에서 다시 빼낸다는 의미다. 가장 흔하고 대표적인 퍼징은 손가락으로 목젖을 건드려 게워내는 것이다. 능숙해지면(?) 손가락을 쓰지 않고도 쉽게 토할 수 있다. 퍼징은 토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뇨제나 설사를 유발하는 약을 복용하거나 폭식 뒤 일정 시간 굶거나 매일 몇 시간씩 강박적인 운동을 하기도 한다.

폭식증과 폭식 먹방은 단순히 ‘음식을 즐긴다’는 측면보다 괴롭힘을 통해 만족을 얻는 증상(가학증)에 가까워 보인다. 폭식은 가학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면에서 스스로를 학대하는 성격(피학증·괴롭힘 당하는 것을 통해 만족을 얻으려는 증상)을 동시에 띠고 있다. 이때 먹는다는 행위는 즐거움이나 쾌락이라는 단어보다는 ‘강한 자극’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이렇게 강렬한 자극 안에서 쾌락과 고통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가학피학적 폭식은 환자의 유년기 초기 대상(주로 엄마를 비롯한 부모)과의 관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대체로 이런 환자들의 유년기 삶은 충분한 보살핌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과도한 간섭과 심리적 영역 침범, 학대, 그리고 방임으로 점철된 경우가 많다. 간섭과 방임은 겉보기에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동전의 앞뒷면처럼 그 이면은 한 뿌리다. 이런 관계의 중요한 성격 중 하나는 과도한 통제다. 폭식증 환자들은 먹고 토하는 행위를 자신이 원할 때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육체를 대상으로 과도한 통제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가해자가 부모나 주양육자였다면 이제는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가해자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반복적 패턴에 ‘반복 강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반복 강박에는 비단 폭식과 퍼징 현상만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거의 모든 종류의 강박증상이나 중독증상이 이에 해당되는데, 이런 면에서 폭식증이나 폭식 먹방은 일종의 중독과 같은 현상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작가 김훈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하동 재첩국은 순결한 원형의 국물이다. 여기에는 잡것이 전혀 섞여 있지 않다. 이 국물이 갖는 위안의 기능은 봄의 쑥국과 거의 맞먹는다.” 음식은 위안이어야 하고, 사람들을 편안하게 연결해주는 무언가가 돼야 한다. 음식이 가학피학성의 도구, 자극 자체가 되어 매체를 통해 소비되는 시대는 불우하다.

강은호 뉴욕정신건강의학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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