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들도 약보다 음식으로 면역력 키워 질병 극복

영주=양종구 기자

입력 2020-06-27 03:00 수정 2020-06-29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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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부터 내려온 건강 관리법 ‘식치(食治)’
왕실의 무병장수 위한 음식문화, 양반 거쳐 서민층에게까지 영향
이석간이 지은 의서 경험방에 115개 병증의 예방-처방법 가득


조선 초기인 1418년(태종 18년) 전국 최초로 건립된 지방 공립의료기관 제민루. 약재 공급을 뛰어넘어 의생과 향촌의 성리학자들이 의학적 지식을 쌓는 배움터 역할을 했다. 영주 식치원 제공
“조선시대엔 음식으로 몸을 다스려 전염병에 대비했습니다.”

19일 경북 영주시 전통향토음식체험교육관 식치원에서 만난 신성미 원장(55)은 “식치(食治)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을 이길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식치란 음식으로 건강을 다스리는 일로, 조선시대 때부터 내려온 건강관리법이다.

“조선시대에 식의(食醫)가 왕의 무병장수를 위해 노력했어요. 식의는 약보단 음식으로 병을 막고 다스렸습니다. 음식으로 왕들의 면역력을 키우는 게 핵심이었고, 이런 왕실의 음식 문화가 선비계층으로 퍼졌고, 다시 서민층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의 식치를 민간이 쉽게 접하도록 만든 의서가 유학자이자 영주 제민루(濟民樓·조선의 지방 의국)의 의사였던 이석간이 지은 ‘이석간 경험방’이다. 2009년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장이 이 책을 국역했고, 신 원장은 국역본을 바탕으로 식치를 연구하며 현대식으로 재현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이석간 경험방에는 115개 병증에 대한 다양한 예방 및 치료법이 망라돼 있다. 신 원장은 이 가운데 식치방에 천착해 현대적으로 해석해 레시피를 만들고 있다. ‘이석간 경험방 상(上) 죽과 밥을 이용한 식치방’이란 책도 펴냈다.

식치는 예방의학이다. 좋은 식자재로 만든 음식을 먹어 면역력을 키우는 게 핵심이다. 신 원장은 “왕실의 식의는 선대왕이 가진 질병을 연구하고 현재 왕의 체질을 살펴, 음식으로 병을 예방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줬다”고 말했다. 식치는 그동안 알려진 궁중음식보다는 담백하고 자연적인 음식으로 몸의 기를 채우라고 강조한다.

신성미 영주 식치원 원장이 직접 펴낸 책 ‘이석간 경험방상(上) 죽과 밥을 이용한 식치방’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그는 좋은 음식으로 면역력을 키우는 식치를 세상에 알리고 있다. 영주=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이날 현장에서 기자도 ‘중풍을 예방하는 동마자율무죽이 포함된 식치’를 체험했다. 식전주 ‘동아약주’를 시작으로 죽, 설하멱적, 진주면, 부빔밥 등 10여 가지 음식을 2시간에 걸쳐 먹었는데 속이 편안했다. 특히 설하멱적은 좋은 쇠고기를 두드려 부드럽게 만든 뒤 간을 하고, 참기름으로 버무려 굽고 얼음물에 담그기를 반복해 만든다. 그 결과 소화가 매우 잘된다. 신 원장은 “식치는 면역력을 높여 예방에 치중했지만 열이 나면 녹두로 죽을 쑤어 내렸고, 잠을 못 이룰 땐 야생대추씨죽을 처방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신 원장은 1992년 경북 예천 출신 남편과 결혼하면서 경북 지역 종가 음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99년 영주로 이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지역 음식 연구에 빠졌고, 2002년 무궁화요리학원을 열어 지역 음식 전수에 나섰다. 지난해 영주시와 함께 식치를 체험하는 식치원을 개원했다.

신 원장은 “영주 선비의 식치는 1418년 조선 최초로 건립된 의국 ‘제민루’가 뿌리”라고 말했다. 제민루는 공립 의료기관이었다. 영주 소백산 지역은 예부터 풍부한 약용 식물이 자생했다. 제민루는 이런 식물들을 채취해 전국에 공급하기도 했다. 제민루는 또 의생과 향촌의 성리학자들이 의학적 지식을 쌓는 공간이기도 했다. 퇴계 이황도 제민루에서 이석간과 같이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 원장은 “조선시대에는 식자재의 효능을 알고 있는 사람들, 즉 왕실의 어의와 식의, 선비들이 식치를 실천하고 기록으로 남겼다”며 “이석간의 ‘경험방’은 영주 지역의 특산물을 연구해 만든 최초의 민간 의서”라고 말했다.

조선 7대 왕인 세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식의서인 ‘식료찬요’의 서문을 썼다. 정조는 식치를 제대로 알고 몸이 안 좋을 땐 직접 특정 음식을 올리라고 지시했다. 영조는 하루 5끼씩 먹던 왕의 식사법 대신 3끼만 먹으며 장수했다. 신 원장은 “세종과 문종, 세조 때 의관 전순의는 종합 의학서인 ‘의방유취’의 편찬에 참여했고 ‘산가요록’과 ‘식료찬요’ 같은 식의서를 남겼다”고 설명했다.

신 원장은 “선비들은 궁극적으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추구했다. 그게 식치고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다. 그런데 이런 좋은 미덕이 일본의 식민지배와 6·25전쟁을 통해 사라졌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이어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식치를 다시 되새겨 생활화한다면 코로나19를 넘어 어떤 전염병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영주=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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