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허점 파고든 수상한 기업회생 신청

김동혁 기자 , 장윤정 기자 , 이건혁 기자

입력 2020-06-17 03:00 수정 2020-06-24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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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사냥 무자본 M&A 세력… 상장폐지 직후 ‘주주 미참석 주총’
청산가치 더 높은데도 회생 신청… 100억대 평택공장 헐값매각 시도
돈 빼돌린 ‘개미도살자’는 작년 구속… 채권자들 “누구를 위한 회생절차냐”




돈을 빌려 기업을 인수·합병(M&A)한 뒤 회삿돈을 횡령한 ‘무자본 M&A’ 세력이 기업 회생절차(옛 법정관리)를 이용해 추가로 돈을 빼돌리는 수법이 드러났다. 정상적으로라면 청산돼야 할 기업에 대해 회생절차를 신청한 뒤 회사에 남은 자산마저 싹 쓸어가는 방식이다. 기업을 살리려는 회생절차가 악용되지 않도록 법원의 면밀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6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개미도살자’로 불리던 기업사냥꾼 이모 씨(63·수감 중) 일당의 타깃이 됐던 전 코스닥 상장사 A사에서 수상한 회생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검찰과 채권단, 내부 관계자 등에 따르면 이 씨와 함께 활동하던 B 전무 등이 검찰의 수사망을 피한 뒤 회사에 남아 이를 주도했다.

이 씨 일당은 2016년 6월 액정표시장치(LCD) 도광판 납품회사인 A사를 170억 원에 인수했다. 자기 돈 없이 금융기관, 사채업자 등으로부터 돈을 빌려 회사를 사들인 뒤 회삿돈으로 차입금을 갚는 등의 수법으로 230억 원을 횡령했다. 경영이 악화된 A사는 2018년 상장 폐지됐다.

채권자 다수는 기업 회생이 힘들다고 보고 청산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회계법인의 실사에서도 청산가치가 기업의 계속가치보다 50억 원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B 전무 등은 회사를 유지하면서 남은 자산을 빼돌리기 위해 회생절차 신청을 준비했다.

이들은 채무자회생법을 이용했다. 회생법 제34조는 주식회사의 경우 자본의 10분의 1 이상을 보유한 주주 또는 채권자는 회생절차 개시를 법원에 신청할 수 있다. 보유지분이 없었던 B 전무 등은 채권자를 활용하기 위해 몰래 감자를 단행했다. 주주들에게 알리지 않고 지방지 2곳에만 공고를 낸 뒤 ‘주주 미참석 주주총회’를 개최해 약 450억 원의 자본금을 30분의 1(약 15억 원)로 줄였다. 1억5000만 원어치 채권만 확보하면 회생절차를 신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이들은 1000만∼3700만 원 상당의 소액 채권을 보유한 거래처 10여 곳을 동원해 2억 원 상당의 채권을 확보했다. 당시 A사의 실무를 담당한 C 이사가 거래처 사장들에게 보낸 이메일에 따르면 “회생절차에 동의하면 최우선 순위로 변제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채권자들은 법원에 회생절차 개시를 신청했고, 지난해 10월 수원지법 제2파산부는 회생 개시 결정을 내렸다. 한 회생 전문 변호사는 “기업이 회생하겠다고 하면 법원이 대체로 인정해 준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라고 했다.

회생절차가 개시되자마자 경기 평택시의 A사 공장이 우선 매각 대상이 됐다. 업계에 따르면 평택 공장은 LCD 특허기술 등을 보유해 100억 원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올해 5월 42억 원가량에 매각이 결정됐다. 이 씨 일당과 함께 활동했던 내부 고발자 D 씨는 “평택 공장은 사실상 A사의 모든 생산을 담당하는 곳”이라며 “B 전무 등이 이를 헐값에 매각하고 리베이트를 받기로 해당 업체와 계약한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공장을 인수하기로 한 업체는 올해 3월 설립된 자본금 3억 원의 페이퍼컴퍼니로 알려졌다.

다수 채권자들은 “누구를 위한 회생 절차냐”며 분개하고 있다. 금융권과 법조계에서는 무자본 M&A 공격에 노출된 기업에 대해서는 회생과 청산에 대해 법원이 더 엄격하게 모니터링을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C 이사는 본보와의 전화통화에서 “당시 대표 권한 대행이었던 B 전무의 지시를 받아 채권자들에게 연락한 것”이라며 “회사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던 과정이었을 뿐 B 전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B 전무도 “이 씨와 2006년부터 알고 지냈으며 A사 인수 당시부터 전무직을 수행한 것은 맞지만 횡령, 자본금 감자 등에는 개입한 바 없다”며 “채권단에 맞서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 것일 뿐, 리베이트를 받거나 받기로 약속했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김동혁 hack@donga.com·장윤정·이건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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