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에는 성별이 없다

박선희 기자

입력 2020-06-03 03:00:00 수정 2020-06-03 18: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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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시장 흔드는 ‘젠더리스’

1990년대 중성적인 향의 ‘CK One’으로 잠시 주목받다가 2000년대를 휩쓴 플로럴의 인기 속에 묻혀 있던 젠더리스 향수가 부활했다. 동아일보 DB
젠더리스, 젠더 뉴트럴, 유니버설, 유니섹스…. 명칭이 어떻든 최근 뷰티와 패션 트렌드의 핵심은 하나다. 성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향수도 마찬가지다. 체취에 민감해지는 계절을 앞두고 어떤 향수를 선택할지 고민이라면 요즘 대세인 중성적인 향을 염두에 두자.

과거 향수의 세계에선 남녀의 구분이 분명했다. 꽃향기를 본뜬 플로럴 계열은 여성 향수, 알싸한 스파이시 계열은 남성 향수로 분류됐다. 여성 향수는 곡선이 두드러지는 유리병, 꽃문양, 화려한 색감의 캡 등을 갖고 있는 반면에 남성 향수에는 직사각형의 어두운 용기나 가죽 패키지 등이 애용됐다.

하지만 남녀의 경계를 흐린 니치(소수를 겨냥한 프리미엄 브랜드) 향수들이 시장에서 점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영국 일간지인 가디언은 “바이레도, 프레데릭 말, 딥디크 등의 니치 향수들이 성별의 스테레오타입을 뒤집는 변화로 시장을 리드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니치 브랜드의 향수들은 용기와 향이 모두 세련되고 중성적인 느낌을 준다.

르라보, 바이레도 같은 니치 브랜드이든, 구찌 같은 고급 브랜드(왼쪽부터)이든 너나없이 젠더리스를 표방하기 시작했다. 각 업체 제공
젠더리스 향수의 시초는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4년대 캘빈클라인의 향수 CK 원(One)은 젠더리스를 표방한 제품으로 세계적인 히트를 쳤다. 남녀 향수에서 모두 사용하는 시트러스 향에다 주로 남성적 향으로 분류되는 우디(woody) 계열 향을 섞었다. 광고 캠페인에서도 남녀가 주체적으로 선택해 다른 느낌을 낼 수 있는 제품임을 강조했다. 뉴욕타임스는 “X세대의 정신을 반영한 향”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후 플로럴 계열의 향이 큰 인기를 끌면서 젠더리스 향수는 잊혀졌다.

젠더리스 향수가 최근 다시 시장을 이끌게 된 것은 젠더 감수성이 높아지고 패션계 전반에 유니섹스 트렌드가 확산되면서 향기를 남녀를 기준으로 분류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 소비 트렌드 조사 회사인 영국의 민텔에 따르면 성 중립적인 향수는 2010년 17%에 불과했지만 2018년 전체 시장의 51%로 절반을 넘어설 정도로 성장했다. 전문가들은 남녀를 떠나 ‘나다운 향기’를 추구하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분석한다.

굳이 젠더리스 제품임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남녀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브랜드들은 큰 인기다. 르라보, 이솝 등은 패키지 디자인도 미니멀하게 단순화한 데다 좋아하는 향이 어떤 것인지에 따라서 남녀 누구나 선택할 수 있게끔 했다.

구찌, 셀린 같은 명품 브랜드도 남녀 구분이 없는 향수를 신제품으로 출시하기 시작했다. 구찌는 지난해 9월 최초의 중성적 향수 ‘메모아 뒨 오더’를 유니버설 향수라는 이름으로 선보였다. 성별뿐 아니라 시대에도 구애받지 않는 향이라는 테마로 미네랄 아로마틱 계열의 향을 썼다. 셀린이 지난해 8월 출시한 11가지 향의 ‘오트 퍼퓨머리’ 역시 남녀 구분이 없다.

특히 젠더리스 향은 강한 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한국인들에게 잘 맞는다는 특징이 있다. 홍연주 코스맥스 향료랩장은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향은 머스크, 코튼, 로즈 향처럼 은은하면서도 지속력이 좋은 향기”라며 “남성적, 여성적 향취가 강렬하거나 독특한 향보다는 친근하면서도 자극이 덜한 중성적인 향의 시장성이 높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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