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질이 아니면 못파는 세상 될것”… 3代 이은 ‘소재강국의 꿈’

김현수 기자

입력 2020-05-29 03:00 수정 2020-05-29 09:57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한국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17> 소재기술 개발 ‘54년 외길’ 효성



‘독일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빨리 발전했을까.’

1954년 기계 발주를 위해 독일을 찾은 조홍제 효성 창업회장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0년도 안됐는데도 눈부시게 돌아가는 공장을 보고 이렇게 감탄했다. 조 회장이 찾아낸 답은 기술력이었다.

6·25전쟁이 끝난 지 1년이 채 안 된 당시 한국은 공산품 기술을 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모든 물자가 부족해 품질을 따지는 이도 적었다. 조 회장의 일화를 모은 책인 ‘늦되고 어리석을지라도’에 따르면 당시 조 회장은 “지금은 물건이 없어서 못 팔지 모르지만 세월이 흐른 뒤엔 품질이 아니면 못 파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착실히 준비해 나가는 것만이 기업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1966년 효성의 전신인 동양나일론 설립 이후 5년 만인 1971년에 한국 최초로 민간 기술 연구소를 설립한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 미국 독일에 의지하던 섬유 제조 기술을 한국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열망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조 회장의 장남 조석래 회장도 소재 원천 개발에 힘을 실으면서 효성은 스판덱스, 타이어코드, 에어백 원사, 안전벨트 원사 등 주요 소재 시장점유율 세계 1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2017년 취임한 조현준 회장은 중국 베트남 인도 등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탄소섬유와 폴리케톤 아라미드 등 신소재 사업을 발판으로 ‘100년 효성’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 “늦되어도… 조국의 샛별이 되자”

조홍제 창업회장의 호는 ‘만우(晩愚)’다. 스스로에게 ‘늦되고 어리석다’는 뜻의 호를 붙인 셈이다. 조 회장은 평생 늦은 출발을 했다. 하지만 ‘새로 시작하는 데 늦은 법은 없다’는 것을 실천해 왔다. 1906년 태어나 19세에 중앙고보에 입학해 신학문에 눈을 떴다. 서른에 대학을 졸업하고 마흔이 넘어 사업에 입문했다. 그리고 예순에 동양나일론 설립으로 효성그룹의 기틀을 닦았다.

‘효성’은 조 회장이 일본 호세이대 경제학부 유학 시절 고향 친구들과 ‘동방명성’을 뜻하는 모임인 동성사를 만들었던 데서 기원한다. 어둠을 밝히는 조국의 샛별이 되자는 뜻으로 모였던 당시의 뜻을 생각해 샛별이라는 뜻의 기업명을 지은 것이다.

조 회장은 기업이 기술을 키우는 것이 국가를 위한 길이라고 봤다. 섬유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기술개발에 매달린 효성은 1967년 ‘타이어코드’ 국산화에 성공했다. 1981년 조석래 회장이 효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에는 더욱 사업 고도화에 힘을 실었다. 기술강국만 만들 수 있는 어렵고 까다롭지만 필요한 소재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 ‘프로젝트Q’로 탄생한 스판덱스
1990년 조석래 회장은 연구원들을 불러 모아 ‘스판덱스’를 개발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연구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고무실보다 쭉쭉 잘 늘어나고, 속옷 안감 겉옷 어디에도 잘 쓰이는 소재지만 만들기는 까다로워 독일 미국 일본만 만들 수 있었다. 뭐가 나올지 의문투성이라며 당시 스판덱스 개발 프로젝트 이름이 ‘Q(Question)’일 정도였다.

효성 내에서 ‘돈만 낭비하는 사업’이라며 개발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았지만 조 회장이 “실패를 두려워했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사업”이라며 연구를 독려했다고 한다. 결국 만 3년여의 연구 끝에 세계에서 네 번째로 스판덱스 개발에 성공했다.

스판덱스는 타이어코드와 함께 효성에서 현금 창출원인 대표적 효자 사업이다. 2010년에는 스판덱스 부문 글로벌 1위가 되기도 했다. 현재에도 스판덱스 시장점유율 32%를 효성이 차지하고 있다. 타이어코드 역시 2000년에 세계시장 점유율 21.5%로 글로벌 1위에 처음 등극했고 현재는 시장점유율 45%로 부동의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 “신소재로 소재강국 이루겠다”

“스판덱스, 타이어코드 등에서 세계 1위에 오른 이유는 소재부터 생산 공정까지 독자 개발해 경쟁사를 앞서겠다는 기술 고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소재 사업의 씨앗을 심기 위해 도전을 계속 해나가겠다.”

조현준 회장은 지난해 8월 전북 전주시 탄소섬유공장에서 이같이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탄소섬유 신규 투자 협약식’ 자리였다. 조 회장은 2028년까지 탄소섬유 산업에 총 1조 원을 투자해 2만4000t까지 생산 규모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단일 규모로 세계 최대 수준이다. 효성은 올 초 2000t 규모의 탄소섬유 공장을 완공하고 생산에 들어간 상태다.

‘꿈의 신소재’로 불리는 탄소섬유는 일본이 먼저 개발했고 현재도 도레이첨단소재가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효성은 2011년 국내 최초로 탄소섬유의 독자 개발에 성공하며 세계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탄소섬유는 수소자동차 연료탱크, 우주항공 등 첨단 미래 산업의 핵심 소재로 꼽힌다.

‘핵심 소재를 독자 개발해 한국 전체 산업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54년 전 기업보국의 창업정신이 여전히 효성의 DNA로 이어져 온 셈이다. 지난해 협약식에서 조 회장은 “‘소재강국 대한민국’ 건설에 한 축을 담당하겠다”고 강조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