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화가’ 서용선이 눈과 몸으로 체험한 뉴욕 미드타운 풍경은…

김민 기자

입력 2020-05-13 10:25 수정 2020-05-13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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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선, ‘Chase’, 2019-2020, 닥종이 위에 아크릴, 59x102.3cm (올미아트스페이스 제공)
“뉴욕에 막 도착했을 무렵이에요. 길모퉁이를 지나는데 체이스은행(JP모건체이스)이 눈에 번쩍 띄어 스케치를 해두었죠. 뉴 뮤지엄에서 열린 (독일 개념미술가) 한스 하케의 ‘작가와의 대화’에 갔다가 록펠러 가문이 체이스 은행을 인수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호기심이 생겨 헌책방에 가서 록펠러와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관계 등 자세한 이야기를 찾아봤습니다. 그 후 34번가에 있는 체이스은행도 하나 더 그렸고요.”

때로는 빼곡한 활자나 100마디 말보다 눈앞의 이미지가 더 솔직하다. 글이 진실을 가릴 때도 있다. 미술가 서용선(69)은 몸이 마주한 풍경에서 문자 이전의 이야기를 수집한다. 체이스 은행의 시각적 특이함을 포착하고 실마리를 추적해간 것처럼 말이다. 지난해 10월부터 미국 뉴욕 미드타운 일대에 머물다 온 그를 5일 서울 종로구 올미아트스페이스에서 만났다.
뉴욕 작업실에서 서용선 작가. (사진가 김진홍 제공)

그의 뉴욕 체류가 처음은 아니다. 이전에는 브루클린이나 퀸즈 같이 뉴욕 외곽에 주로 머물렀다면 이번엔 중산층 이상이 많은 상업지대라는 점이 달랐다. 과거 뉴욕은 짙은 갈색이 두드러졌지만 이번엔 녹색으로 스케치를 시작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스타벅스의 녹색이 강하게 들어왔다고 한다. 이렇게 마주한 풍경을 기록한 그의 드로잉은 올미아트센터 ‘종이그림’전에서 볼 수 있다.

5개월 반의 체류 중 록펠러가 그에게 많은 인상을 남긴 듯했다.
서용선, ‘자화상’ 37x27.8cm, Acrylic on Paper, 2019 (서용선아카이브 제공)

“뉴욕에 도착하고 처음엔 자화상을 그렸어요. 매일 카페나 공원에서 도시와 사람을 관찰했죠. 두 달 쯤 됐을 때 록펠러센터 지하통로를 발견했는데, 묘하더군요. 추운 겨울에 무료로 따뜻하게 머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에요. 주로 흑인이나 남미계 직업 없는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경비가 삼엄해서 졸기만 해도 쫓겨나는 제한된 자유의 공간이었죠. 독특한 모델이 많고 그림 그리기 좋아 두 달은 여기서 스케치를 했습니다.”
서용선, ‘돌 쌓는 사람’, 2017, 린넨에 아크릴, 200X280cm (갤러리이마주 제공)

사람들은 그를 ‘단종(端宗) 화가’나 역사화가로 기억한다. 소설 ‘단종애사(端宗哀史)’처럼 기록되지 않은 역사의 현장을 포착한 작품들로 유명하다. 서울 강남구 갤러리이마주에서 30일까지 열리는 ‘고구려, 산수’전에서도 중국에 남은 고구려 흔적을 그린 작품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도시풍경도 텍스트 이면의 포착되지 않은 것들을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역사화와 맥락을 같이한다.

‘종이그림’전에서는 각종 포장지를 활용한 콜라주 작품도 눈에 띈다. 작업실 맞은편의 베이커리에서 내주는 빵 포장지나 동그란 입이 달린 우유 곽, 매일 먹는 약 껍질이 재료가 됐다.
서용선, ‘약 먹는 남자’, 2020, 종이가방 위 혼합매체 콜라주, 85x51.5cm (올미아트스페이스 제공)

“처음엔 소재나 내구성에 관심이 갔는데, 내 몸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어느새 약을 먹지 않으면 1, 2년 내로 삶이 어그러지는, 약이 절대적인 조건이 돼버렸어요. 이런 소재들은 단순한 조형성을 넘어 삶의 본질에 관한 이미지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그림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몸을 둘러싼 풍경과 인식을 복합적으로 담는 과정이라는 이야기로 들렸다. 이번 뉴욕 체류에 대해서도 그는 “지역마다 다른 특수성을 어떻게 그림에 구조화시킬지 고민하는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그 결과물이 될 캔버스 작품들은 뉴욕의 갤러리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당초 11월 전시를 목표로 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일정은 정해지지 않았다. ‘종이그림’전은 다음달 3일까지 열린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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