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 재료 아닌 몸에서 나오는 것”…한국적 ‘신표현주의’ 보여준 황창배[한국미술의 딥 컷]

김민 기자

입력 2020-03-30 16:49 수정 2020-03-3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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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의 딥 컷<1>한국적 신표현주의, 황창배

딥 컷(Deep Cut). 대중음악에서 이 말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마니아들이 인정하는 명곡, ‘숨은 보석’을 가리킨다. 한국 미술에도 당당히 세계에 내놓을 만한 ‘딥 컷’이 있다. 다만 한국 미술시장에서 아기자기하고 예쁜 그림의 수요가 많고 관객과 만날 기회가 제한되면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 미술의 ‘숨은 보석’을 심층적으로 소개한다.

황창배의 그림은 ‘무조건 부정’에서 시작했다.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거꾸로 보며 그리기도 하고, 제일 싫어하는 색을 일부러 뿌려 보기도 했다. 그의 자화상에서도 이러한 기질이 드러난다. / 황창배, 무제(1995년), 캔버스에 아크릴, 72×60㎝, 황창배미술관 제공


1980년대 세계 미술계에는 신표현주의 바람이 불었다. 국내에서도 인기인 영국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를 비롯해 신표현주의 작가들은 지금까지도 미술시장의 주류로 활동 중이다. 이런 신표현주의를 한국적 맥락에서 보여준 작가가 황창배(1947~2001)다.


● 개념에서 회화로…신표현주의

독일 작가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기존의 사회 질서와 작별하는 ‘판데모니엄 선언’을 한 뒤 위 아래가 뒤집어진 그림을 그렸다. / 게오르그 바젤리츠, Ralf W. -Penck - Kopfbild(Head Painting), 1969, 캔버스에 오일, 162 x 130 cm ⓒGeorg Baselitz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은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를 ‘1980년대 초·중반 미국과 유럽의 미술시장을 점령한 예술가(주로 화가)들의 다양한 움직임’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신표현주의는) 1970년대까지 고도로 개념화된 추상예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체나 형태의 표현으로 돌아간 젊은 작가군을 가리킨다. 기법은 다양하지만 공통 요소가 있다. 전통적 구성과 디자인의 거부, 동시대 도시의 삶과 가치를 반영한 모호하고 불안정한 감정 표현, 부조화와 날카로운 색채 대비, 대상의 유희적이고 강렬하며 원시적인 표현 등이다.”

현재 미술시장에서 작품 최고가를 형성하는 다수의 작가도 신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독일의 안젤름 키퍼, 게오르그 바젤리츠,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미국의 장 미셸 바스키아가 그렇다. 이들은 미술사의 단계적 흐름을 벗어나 개인의 관점에서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주관성이 두드러진다. 황창배 또한 이런 신표현주의의 속성에 뒤지지 않는 혁신을 보여줬다.


● ‘한국적 신표현주의’

황창배의 거의 모든 작품은 제목이 없다. 생전 그는 “제목을 달아 작품의 다양한 면을 한정시키지 않고, 그림으로만 충분히 보여 주겠다. 제목에 신경을 기울이기보다 작품 제작에 몰두하겠다”고 했다. 대부분의 작품 내용은 이미지에 따라 추측해보는 수밖에 없다.

황창배, 무제(2000년), 장지에 혼합재료, 265 ×150㎝, 황창배미술관 제공

이 그림은 작가가 담도암 수술을 받고 작고하기 전 해인 2000년에 완성된 것이다. 지난해 국내에 선보인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을 연상케 한다. 그림의 절반 이상을 어두운 계열의 검은색과 갈색이 덮고 있지만 인물의 화려한 머리색과 의상이 화면의 산뜻한 분위기를 주도한다.

그림 속 왼쪽 아래 나무에서 시작돼 오른쪽 상단까지 이어지는 녹색 선, 세 갈래로 뻗어나가 중심을 잡는 가운데 인물의 붉은 팔, 그림의 무게를 잡아주는 어두운 배경 위 인물의 무채색 옷을 눈여겨보자.

화면의 리듬감을 위해 작가는 인체의 형태나 색채, 배치를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그림의 출발은 같은 도시 풍경이겠지만, 결과물은 작가 고유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버전이다. 20세기 초 독일의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1880~1938), 노르웨이의 에드바르 뭉크(1863~1944) 등의 표현주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속성이다.

오른쪽 아래 서명에는 평소 단기(檀紀)로 표기했던 연도를 서기(西紀)인 ‘2000’으로 적어 독특하다. 이 무렵 작가는 담도암 수술을 받고 충북 괴산 작업실에서 나와 서울에서 생활했다. 21세기를 맞아 낯설 정도로 탈바꿈한 도시의 모습을 작가의 눈에 비친 대로 담고 있다.

● ‘한국화 테러리스트’
우측에 닭이 우는 소리 ‘꼬꼬댁’을 적은 위에 X표를 긋고 좌측에는 곡고댁(哭高宅)이라고 썼다. ‘높은 집 때문에 곡소리가 난다’는 뜻으로 빈부격차를 풍자한 듯하다. 문자를 시각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이 돋보인다. / 황창배, 무제-哭高宅(1990), 한지에 혼합재료, 127 ×61㎝, 황창배미술관 제공.

“한국적 이미지를 찾고 드러내는 작업, 그것이 저의 관심입니다. 밀가루로 빵만 만드는 게 아니라 수제비, 국수도 해먹을 수 있어요. 새로운 한국화 운동, 우리의 공통된 이미지를 찾아가는 길에 동양화가나 서양화가 또 조각가 등 모든 이들이 동참해야 합니다.” (1990년대 월간지 인터뷰)

황창배는 동양화로 그림을 시작했다. 1966년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한 그는 한국미술을 체계화해야겠다고 결심해 전공을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바꾸었다. 월전 장우성(1912~2005)을 찾아가 동양화를 배우고, 서예와 전각은 철농 이기우(1921~1993)를 사사했다. 1975년에는 청명 임창순(1914~1999)에게 한학과 한국 서예미술사를 공부했다.

이후 황창배는 파격을 거듭한다. 한국에선 서양적으로, 서양에선 한국적으로 보이는 그림들이었다. 이런 작품들로 그는 ‘한국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얻어 주목받는가 하면, 동양화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는 비난도 받았다. 파격의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전통적 동양화를 공부하다보니 이것 또한 중국적 화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선 서양인의 방법론을 선택하며 기존 미술에 대한 반발로 모든 것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1989년 ‘New Life Magazine’ 특집 대담 ‘황창배 화백의 작품세계’)

전통에 대한 저항과 부정은 신표현주의의 또 다른 특징이다. 극단적 예가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거꾸로 그린 그림들이다. 바젤리츠는 왜곡된 형태에 폭력적일만큼 화려한 색채를 더했다. 작품을 실제로 접하면 어지러움이 느껴질 정도다. 황창배 또한 끊임없이 관습의 파괴를 시도하며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 나갔다. 그 과정은 아래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황창배, 무제(1987), 한지에 채색, 150×189.5㎝,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자유롭게 종이 위에 번지도록 무작위로 선을 그린 다음, 그 속에 구체적 형상을 추가해 완성했다. 비슷한 작품들을 ‘숨은 그림 찾기’ 시리즈라고도 한다. 사군자나 산수(山水)라는 전통적 동양화의 소재를 벗어났고, 색채를 금기시했던 한국화의 관습도 탈피했다. 녹색은 물론 그림 하단에 붉은색과 파란색을 더해 생동감을 더한다.

이 무렵 선화랑 개인전에서 선보인 유사한 작품군에 대해 그는 후일 “전통적 공간이나 선묘에서 벗어나 시간도 없고 원근도 없는 그림을 시도한 것”이라며 “그러나 너무 작품이 예쁘게 보여 불만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 한국성(性)은 “몸에서 나오는 것”

이후 작품은 “일기장을 쓰듯 그림을 그린다”는 말처럼 개인의 시각언어 완성에 집중해갔다.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1991)이 소재가 되거나 한국 화가 최초로 방북해 북한 풍경을 스케치(1997)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관념적인 한국성(韓國性)을 강조하기보다 작가의 주관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1989년 월간 ‘동양화’와의 인터뷰에서 ‘현대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따지고 보면 과거의 모든 사람들도 자신이 현대를 살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우리도 조금만 지나면 과거의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감동을 극대화시켜 최선을 다하는 일, 그것이 현대성이라고 생각한다. 현대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생각은 해본 일이 없다.”

바스키아가 작품에 차용한 그래피티는 특정 시공간에서 개인이 처한 정체성과 문화를 보여주는 소재에 불과하다. 황창배가 동양화 기법이나 소재를 활용한 것도 한국에 살고 있는 ‘개인 황창배’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런데 ‘집단적’ 한국성을 찾으려는 시각이 그의 작품을 예술 자체로 보는 데 걸림돌이 된다. 그의 작품에 관한 담론 대부분이 한국화나 서예의 토대에서만 이뤄져서 그렇다. 예술작품의 한국성을 고정된 소재나 색, 기법으로 한정시키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황창배는 생전 글과 인터뷰를 통해 ‘그러한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진정한 한국성이란 무엇일까. 그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힌트를 남겼다.

“인류 역사는 도구 변화의 역사다. ‘한국의 색’ 또한 애초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 유입되고 변주된 것이다. 가야금 하나로도 다양한 연주를 하고 서양악기와 합주를 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온전히 우리 것도 아닌 것을 그대로 따라하기를 강요하는 것은 억지다. 한국성은 시대에 맞게 자연스럽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황창배, 무제(1994), 캔버스에 혼합매체, 259×194㎝,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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