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히터-보이스-키퍼… 獨 현대 미술의 초상

김민 기자

입력 2020-03-02 03:00 수정 2020-03-0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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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작가 미상’서 그린 독일 화단

‘작가 미상’은 독일 예술계를 다소 과장되게 그렸지만 몇몇 주요 장면을 보여줘 흥미롭다. 주인공이 뒤셀도르프에서 만난 안토니우스 판 페르턴 교수(사진)가 털어 놓는 과거사는 현대 미술의 거장 요제프 보이스의 실제 이야기다. 영화사 진진 제공
“이런 예술은 너도 할 수 있어.”

1937년 독일 드레스덴의 한 미술관. ‘추상화의 개척자’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의 그림 앞에서 나치당원이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전시는 나치에 의해 퇴행적이라 치부된 작품을 모은 ‘퇴폐미술전’이다. 나치당원은 이렇게 일갈한다.

“이 예술가들이 시력에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유전병에 걸렸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는 지난달 20일 개봉한 영화 ‘작가 미상’의 첫 장면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독일을 배경으로 하는 ‘작가 미상’은 예술가인 쿠르트 바르너트(톰 실링)의 삶을 그렸다. 바르너트는 독일 미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88)를 연상케 한다. 리히터는 안젤름 키퍼(75), 게오르크 바젤리츠(82)와 함께 현대 회화를 주도한 독일 출신의 세계적 작가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에마’ 영화사 진진 제공·ⓒAnselm Kiefer/Flickr·ⓒJoseph Beuys/Wikiart
○ 20세기 후반 미술사의 중심, 독일

독일은 ‘퇴폐미술전’의 굴욕을 딛고 프랑스 파리, 미국 뉴욕에 이어 20세기 국제 미술사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여기에는 개인이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역사가 한몫을 했다.

리히터, 키퍼, 바젤리츠는 모두 동독 출신이다. 나치와 전쟁의 끔찍한 역사를 유년기에 겪었다. 이후 서독으로 이주하지만,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직시한 것도 공통점이다. ‘작가 미상’의 영어 제목이 ‘직시하라(Never Look Away)’인 것처럼 이들의 예술도 1차적으로는 사회를 증언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하이데 씨’ 영화사 진진 제공·ⓒAnselm Kiefer/Flickr·ⓒJoseph Beuys/Wikiart
리히터는 영화에서 묘사되듯, 사진을 회화로 옮겨 초점을 흐린 ‘포토 페인팅’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전쟁이나 ‘바더-마인호프 그룹’(1960, 70년대 활동한 극단적 테러 집단)도 소재가 됐지만 일상과 정물, 풍경도 그렸다. 이를 통해 작가는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를 떠나 불안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조건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추상 회화, 컬러 차트 등 다양한 시리즈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친절히 보여준 것도 특징이다.

영화에 등장하진 않지만 바젤리츠와 키퍼도 중요한 작가다. 바젤리츠는 위아래를 뒤집은 회화로, 키퍼는 매혹적 폐허를 회화와 설치로 보여줬다. ‘신표현주의’로도 일컬어지는 이들 작가는 하나의 소재에 집착하지 않는 끊임없는 변주와 뛰어난 기교로 세계인을 사로잡았다. 개념과 설치 위주였던 미술계의 흐름을 회화로 되돌린 것도 이들이다.

안젤름 키퍼의 ‘Athanor’(그림 일부) 영화사 진진 제공·ⓒAnselm Kiefer/Flickr·ⓒJoseph Beuys/Wikiart
영화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중절모에 낚시 조끼를 입은 안토니우스 판 페르턴 교수(올리버 마수치)다. 그는 ‘20세기 다빈치’로 불리는 현대 미술가 요제프 보이스(1921∼1986)를 모델로 했다. 설치, 퍼포먼스, 사회 참여 등 예술을 다양한 형태로 확장하며 독일을 예술의 중심지로 바꿔 놓은 주인공이 바로 보이스다.


○ 영화는 감독이 그린 픽션

영화 속 모든 인물은 가명이다. 픽션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바르너트의 이모인 엘리자베트의 죽음은 사실이다. 실제 리히터의 이모 마리안은 정신분열증으로 나치에 의해 불임수술을 당했고 수용시설에서 굶어 죽었다.

요제프 보이스의 퍼포먼스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법’. 영화사 진진 제공·ⓒAnselm Kiefer/Flickr·ⓒJoseph Beuys/Wikiart
그러나 영화는 어디까지나 감독이 창조한 이야기다. 특히 리히터는 그림 속 인물에 대해 밝히기를 늘 꺼렸다. “작가보다 그림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영화는 재미를 위해 작품보다 개인사를 극적으로 그렸다. 이 때문에 리히터는 영화 개봉 후 슈피겔지에 “너무 선정적이고 과장됐다”고 말했다.

연출은 2006년 ‘타인의 삶’으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플로리안 헹켈 폰 도네르스마르크 감독이 맡았다. ‘작가 미상’도 2019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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