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술보다 중요한 건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

김기윤 기자

입력 2020-01-31 03:00 수정 2020-04-0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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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포스터 작가 김호근 씨
300편 이상 찍은 19년차 베테랑…촬영전 수백쪽 대본 보고 또 보고
‘고맙고 미운사람 떠올려라’ 주문에 은퇴 공연 앞둔 발레리나 눈물 왈칵
“강하늘, 작가 믿고 따라준 모델 故전미선 내 포스터만 10년간 써”


김호근 작가는 시간이 날 때면 노래 가사만 따로 모아 독서하듯 읽는다. 그는 “늘 이미지만 촬영하고 이미지에 둘러싸여 일하지만 사진에서도 텍스트가 중요하다”며 “배우가 어떤 단어를 듣고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제 몫”이라고 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벤허’ ‘호프’ ‘지킬앤하이드’ ‘빅 피쉬’ ‘드라큘라’ ‘웃는 남자’ ‘시라노’ ‘환상동화’…. 공연계를 뜨겁게 달군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정답은 김호근 사진작가(42)의 셔터를 거쳤다는 것. 포스터, 캐릭터 포스터, 드레스 사진, 프로그램북 속 리허설 사진 등 공연이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의 첫 이미지가 전부 그의 손에서 탄생한다.

현재 공연계가 믿고 맡기는, 가장 트렌디한 사진작가로 통하는 그를 28일 서울 강남구 서울사진관에서 만났다.

관객이 공연장을 나오며 하는 “저 포스터 속 표정 참 잘 어울린다”는 말이 가장 짜릿하다는 그는 19년차 베테랑이다. 아르바이트로 첫 촬영을 시작해 300편 이상의 공연을 찍었다.

“제작사의 요구사항이 정해진 때도 있지만 배우들의 진정성을 끌어내려면 저도 수백 페이지의 대본을 꼭 봐야 합니다.” 그의 촬영 원칙이다.

보통 10시간 넘는 촬영에서 2000번 이상 셔터를 누른다. 테스트촬영 10분 만에 “어? 벌써 나왔다”를 외치며 촬영을 마칠 때도 있다. “배우의 눈빛이 충분히 카메라에 들어왔을 때죠.”

서울 대학로와 극장을 누비며 ‘공연 덕후’로 통하는 그는 사실 경성대 사진학과 저널반에 다니며 언론사나 잡지사 취직을 꿈꾸던 공연 문외한이었다. 그러던 2002년 어느 날 방송국 아르바이트를 하며 친분을 쌓은 정은표 배우의 소개로 대학로 공연 ‘토토’ 촬영에 발을 들였다.

“연습실에 들어선 순간, 이게 신세계더라고요. 배우들이 땀 흘리며 연기하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찍는 게 매력이었죠. 용돈벌이로만 생각하다 나중에는 일만 들어오면 바로 부산에서 서울행 새마을호를 탔습니다.”

잡지사 취직 후에도 틈틈이 공연장을 찾던 그는 2009년 서울사진관을 열고 공연 포스터 촬영에 전념했다.

그는 “사진 기술보다는 피사체의 마음을 여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무대 체질인 배우라도 스태프 수십 명이 지켜보는 낯선 현장에 서면 금세 얼어붙는다. 배우의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어떤 질문을 던질지도 고민해야 한다. 웃는 표정이 필요하면 ‘웃으라’는 주문을 하는 대신 배우를 웃게 만든다.

은퇴 전 마지막 무대를 앞둔 강예나 전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를 촬영할 때는 “이 순간 가장 고맙고, 미운 사람을 떠올려 달라”고 했다. 1초 만에 눈물을 쏟아내는 강 무용수를 렌즈에 담아 포스터로 사용했다.

“이 공연 포스터들은 저와 많은 분이 머리를 맞대고 백지에 그려낸 공동 창작물입니다” 왼쪽부터 김준수, 강하늘, 김선영, 홍광호, 카이 배우의 작품별 포스터. 오디컴퍼니·스토리피·알앤디웍스·CJ ENM·뉴컨텐츠컴퍼니 제공

렌즈를 사이에 두고 배우와 눈빛을 맞댄 기억은 소중하다.

최근 연극 ‘환상동화’에 출연한 강하늘 배우에 대해서는 “카메라 앞에서 망가질 준비가 된 배우다. 작가를 믿고 따라와 준다”고 했다. 고 전미선 배우의 유작이 된 ‘친정엄마와 2박 3일’을 얘기하면서는 “제가 찍은 포스터만 10년째 계속 썼다”며 프로그램북을 어루만졌다. 최근 작업물 중에서는 뮤지컬 ‘호프’의 김선영 배우를 담은 캐릭터 포스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최종 결과물을 보며 찍는 영화 포스터와 달리 공연 포스터는 대본 안에서 느낌을 뽑아내야 한다. 촬영장에서 처음 만나는 배우들과 함께 앞으로 펼쳐질 무대와 세트, 연출까지 떠올린다. 그는 “공연 포스터는 많은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백지에 그려낸 공동 창작물”이라며 “저는 배우의 몰입과 상상을 돕는 조력자일 뿐”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김 작가는 “배우에게 질문하고 찍기만 했지, 사진 찍히고 인터뷰 주인공이 되는 건 뭔가 낯설다. 역시 저는 찍는 게 더 좋다”면서 웃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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